슬리퍼 한 켤레
스물 두해 신은 슬리퍼 한 켤레
책상 밑에서 잠시 쉬고 있다
발뒤꿈치 닿은 자리엔 낮달 뜨고
가운데 부푼 언덕 넘으면
엄지발가락 닿은 자리에
노랗게 물든 은행잎 한 장
나머지 네 개가 누른 자리에
은행 네 알, 가지런하다
발가락 힘주어 파 놓은 웅덩이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이 고였던가
해 바뀌어 떼어내는 달력마다
얼마나 많은 얼룩이 묻었던가
삶은 반들반들한 빙판 위 걷는 일 같아서
걷다가 넘어져 깊숙하게 흉터 패이지만
그곳 눈물 마른자리에서
시간의 얼룩 같은 연꽃 피울 줄도 알았다
아, 슬리퍼가 끌고 오르내리던 계단 난간의
아슬아슬한 生을 생각하면 통째로 쪄서 말린
고구마를 먹는 일처럼 목 메인다
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