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길따라 눈길을 배운다.
1. 강, 강물, 흐름
가을 저녁 강은 거대한 나무가 땅에 누운 것처럼 누웠습니다. 밤이면 식은땀을 흘리며 몸살을 앓았습니다. 온 몸을 떨며 밤새 뒤척였습니다.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지 막막하였습니다.
강물은 보름달을 삼킨 아이가 사는 마을에 잠시 들러본 적도 있으며, 겨울 논으로 달려가 그 곳에서 얼음으로 서걱서걱 온 몸을 동여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강물은 이 마을 저 마을로 향하는 나들 목에서 거대한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 둥지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나들 목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강물이 튼 둥지에 대한 소문을 풍문으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둥지에서 울음소리가 났다고 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새벽 안개 속에서 둥지가 꿈틀대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둥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드물었고, 입담을 자랑하는 유세객들만 무성하였습니다.
다만 사람들은 그 강에 매달린 마을의 등불 몇을 보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가끔 둥지를 드나드는 새들의 소리가 들렸으나 그 소리는 그저 바람소리처럼 지나갔습니다. 어느 마을에서는 개 짖는 소리가 들렸으며, 논밭에서는 저벅대며 볏단을 나르는 형제의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가을 저녁 집 뒤꼍의 감나무가 붉게 익어갔고, 솔숲은 잠시 달이 쉬어 갈 수 있는 터를 닦았으며, 강물은 둥지에서 또다시 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강은 천년도 넘은 잠에 취한 거인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그 곤한 잠을 자기까지 얼마나 많이 몸을 뒤척이며 산을 넘고 절벽을 파고들었으며 바위를 부수었을까를 생각합니다. 단 한번도 쉰 적이 없습니다. 사람의 마을이 생겨나기 전부터 사람의 마을이 사라질 이후까지 흐를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뒤흔들리고, 세월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어도 강물은 흐르는 그 물길을 고집할 것입니다. 강물은 천년동안 천리 길을 쉼도 없이 흘러 그 물길을 흐르고 있습니다.
2. 물길은 눈길을 열어줍니다.
노을이 산을 넘고 파란 하늘을 물들이는 오늘 저녁에도 강물은 흘러가고 있습니다. 강물에 손을 씻고 강 언덕길을 따라 걸으면 눈도 길을 찾습니다. 앞산이 넘어져 쓰러지던 날에도 강물은 그 그림자를 안고 아래로 아래로 흘렀습니다. 가끔은 집채만한 바윗덩이도 부수고 흘러 흘러 낮게 낮게 스며 들어 갑니다. 강은 그 땅의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갑니다.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며 가장 낮은 곳에 거처를 정합니다.
강이 흐르는 길은 사람의 눈길을 만듭니다. 강물이 흘러가는 길을 따라 걷다보면 눈이 보아야 할 길이 열립니다. 아래로 나아가는 물길을 따라 가면 눈길이 열립니다. 강물은 낮아지는 물길로 한번도 흐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흐르는 물길을 따라가면 자꾸만 사람의 눈길도 낮아지고 아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올수록 눈길이 열리며 <작고 하찮지만 소중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길은 흐름입니다. 물길은 낮게 스며들어가는 일입니다. 눈길은 눈이 향하는 길입니다. 그 향하는 시선을 따라 머물 곳을 찾는 길입니다. 그러면서 걸음을 옮겨가는 일입니다. 물이 흐르는 길에서 사람은 사람마음에 아주 서서히 스며들어 마음에 둥지를 트는 눈길을 배웁니다. 그 둥지에서 희망을 품는 눈길을 배웁니다. 눈은 너무 오랫동안 그리움을 담고, 길을 찾으며 살았습니다.
3. 강물, 눈길, 혹은 스며드는 길
강물은 철벅철벅 몸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몸을 뒤척이면 산그림자만 출렁출렁 비늘을 떨구었습니다. 감빛 노을이 하늘 가득 붉은 피를 토해 내는 저녁부터 울렁대던 속은 기어코 병이 났습니다. 머리 풀어헤친 상처가 덧나고, 젊은 날의 상흔이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야전잠바가 좋았던 젊은 날 연어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려고도 했습니다. 어머니의 강을 찾아 폭포를 오르고 절벽을 기어올랐습니다. 길이 좁으면 둑을 터 버리고 넘쳐흘러 들판 가득 덮었습니다. 사람들이 쌓아 올린 강둑은 뛰어넘기가 너무 쉬웠습니다. 높이 오르는 일은 정답처럼 보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뒤덮는 일은 너무 쉬웠습니다. 바닥의 깊이로 깊게 파고 들어가는 방법은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벼 모종 사이사이로 새어들어 스며드는 방법은 알지 못했습니다.
막힌 가슴을 뚫으려면 하늘에 주먹질을 해대고 두 눈 치켜 뜨면 그만이었습니다. 하지만 낮은 곳으로 흘러드는 눈길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낮은 곳의 바닥과 그 깊이로 잦아드는 그 물길을 거스를 수는 없었습니다. 강물이 낮게 흐르는 것은 바닥의 깊이를 더욱 깊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 낮아짐과 깊어짐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사람의 눈길도 높은 곳을 향하지만 낮은 곳으로 향하는 시선을 거둘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은 살면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며 바라보는 습성에 익숙합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며 본 적이 아주 드뭅니다. 땅 속에 뭍힌 뿌리를 볼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주렁주렁 열린 열매만을 탐하느라 가장 높은 꼭대기를 쳐다보며 살아왔습니다. 잘 익은 녀석 한 움큼 베어 물고 싶은 욕망만을 키워오며 살았습니다.
젊은 날의 상흔에서 새살이 돋을 거라 쉽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 상처 속에서 흘러서 찾아야 할 길이 있다고 이야기하겠습니다. 높은 곳에 매달린 열매가 맛있다고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 열매도 떨어지면 씨앗이 될 수 있음을 말하겠습니다. 강물 속에는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가 산다고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그 물길이 흘러 땅속 속속들이 스며들고 있음을 이야기하겠습니다. 눈길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습성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눈길이 물길을 따라가면 정말 중요한 것들이 보일 거라 말하고 싶습니다.
낮아지는 길에서 깊어지는 물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람 마음에 스며드는 길에서 새알을 품는 둥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움이 깊어진 눈길에서 "내 슬픔과 아픔을 자기 등에 짊어지고 걸어가는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