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은 죄, 이별할 몇가지
"내가 직접 행동하지 않았어도 내 안으로 파고드는 무거운 부끄러움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내가 직접 그 상황에 참여하지 않았어도 내 안을 후벼파는 반성의 손가락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전한 일인가........내가 일으킨 일이 아니어도 내가 책임져야 할 무거움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 일인가.......내가 눈물 흘리게 하지 않았어도 눈물 닦을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고 다녀야 함은 얼마나 절실한 일인가....."
내가 누리고 있는 이만큼의 행복과 평화는 앞선 누군가의 가슴앓이와 바로 옆에 있는 그 누군가의 슬픔에서 나온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순간도 내가 누리는 영광과 기쁨은 그 누군가의 슬픔과 눈물위에 서 있습니다.
내가 피해를 당하지 않았어도 그 피해 받은 사람과 함께 내 안의 분노를 감당해야 하는 일은 너무도 중요한 일입니다. 내 옆의 누군가가 무너지면 그 피해와 아픔은 곧 나에게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누군가의 다음은 곧 나자신이며, 그 누군가의 옆에는 바로 내가 서 있습니다. 그 누군가가 아픔을 겪고 나면 그 아픔은 내 가슴으로 찾아오는 법입니다. 그 누군가가 슬퍼하면 그 슬픔은 내 안으로 자리를 옮겨 올 것입니다.
우리한테는 <내가 직접 가담하지 않았어도 내 안으로 파고드는 무거움>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내 일이 아니어도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 진정성>을 깨달았습니다. <내일이 아닌 것의 책임성>은 인류의 소중한 자산이며, 모두가 갖고 있는 마음입니다.
내가 우신 10년을 살아오면서 저지른 죄가 많습니다. 또한 내가 협조하지 않았어도 이미 내 안으로 파고든 무거운 죄가 있습니다. 이미 자리잡은 죄와 이별하고 싶습니다.
.................<내가 이별해야 할 몇 가지>..............
1. 이별할 것 하나: "침묵"
아주 많은 날들의 교무회의 시간, 전달의 파수꾼들이 일어나 그 날의 할 일을 전달했습니다. 나는 그 전달 사항을 듣고 교실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전달받은 내용을 아이들에게 다시 전달했습니다. 왜 그 내용을 전달해야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전달 내용에 대한 비판과 판단은 생략하였습니다. 오직 전달 내용을 제대로 전달을 했는가 아니면 제대로 전달을 하지 않았는가가 판단의 기준이었습니다. 전달내용을 <왜> 전달하는가보다는 <어떻게> 제대로 전달했는가가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전달내용에 의문을 품은 자는 그 전달의 과정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자들이었습니다. 그 전달체계의 이단자들이었습니다. 모두가 전달체계의 전달신호로서 부품화되고 부분화 되었습니다. 나는 많은 시간을 침묵하였습니다. 아침마다 그날 전달신호의 색깔만을 가리려 애썼습니다. 흰색기를 올렸는가 청색기를 올렸는가를 파악하여 다시 아이들에게 신호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는 청색기로 전달 할 뿐이었습니다. 교사들의 능력은 강압적 방법으로 전달했는가와 위장된 평화로 전달했는가를 통해 차이가 났습니다.노련한 교사들은 유연한 방법과 손쉬운 방법을 적절히 사용하였습니다. 아이들은 그저 전달하는 자를 제왕처럼 모셨으며, 신하된 자로서 침묵을 배웠습니다. 의문을 품은 자는 그 교실공간에서 추방될 자들뿐이었습니다.
아직은 침묵이 굴종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전달되는 내용에 대한 판단을 중지한채, 다시 아이들에게 전달하였습니다. 전달체계는 상하의 위계질서를 통해 아주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상명하복의 무조건적인 전달을 통해 권력의 통제에 길들여지고 있었습니다. 무조건적인 전달의 강요가 <권력을 이용한 길들이기>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일방적인 의사전달의 체계에서 질문이나 의문은 불온한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낙인찍었습니다. 말하는 내용보다 말하는 자들을 문제삼는 문화체계에서 가장 훌륭한 교사는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아이들을 침묵시키면서 가장 많은 내용을 전달 할 수 있는 자들뿐이었습니다.
내가 지은 첫번째 죄, 그 때 그 상황에서 질문하지 못하고, 또한 전달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아이들을 침묵시켜 굴종하게 만든 일입니다. 나는 의문을 품고 질문을 하고, 의심하고 진리를 찾으려 애쓰는 아이들을 건방지다는 도덕적인 평가를 하며 따로 불러 나무랐습니다. 때로 반항하는 아이들은 교실밖으로 쫓아냈습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나오는 포로들처럼, 의심을 품은 자를 비난하고 야유를 보내는 무리에 나도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2. 이별할 것 두울: "그때 그 상황에서 아무일도 하지 않은 일"
그날 나는 회의실로 불려갔습니다. <그>는 물었습니다. 누가 시켜서 전태일 평전을 아이들에게 읽혔느냐고.....나는 아이들에게 생일선물로 책을 한 권씩 사주었고, 사준 책은 전태일 평전을 비롯하여 갈매기의 꿈, 꽃들에게 희망을, 아름다운 비행, 어린 왕자,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아우를 위하여 등 많은 책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전태일 평전을 의식화 교육의 자료로 이해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 무리의 맏형인 <그>는 물었습니다. 왜 불순한 세력의 사주를 받아서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였느냐고.....
그때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웠습니다. 내가 혹시 인정받는 무리의 집단에서 추방되지 않는 것은 아닌가 두려웠습니다. 권력의 무리가 머리 쓰다듬어 주는 칭찬이 아주 많은 교육의 역동성을 빼앗는다는 사실을 알지못했습니다. 새장속의 새가 주인이 주는 먹이를 먹으면서 날수 있는 비행능력을 퇴화시키고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인정과 칭찬만이 내 교육적 활동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그때 그 상황에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에게 진실을 알려주는 일에는 위험과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거짓의 세계에서 추방되는 외로움이 있었습니다.안정된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게는 그 모든 것을 견뎌낼 만큼의 용기가 없었습니다.
나는 바로 그 상황에서 아무일도 않은 것처럼, 아이들과의 대면적 상황에서도 아무일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이들이 집을 나가 거리를 헤매고 있어도, 아이들이 마음아파 숨죽이며 흐느끼는데도, 아이들이 자기 삶을 미워하며 괴로워하고 있는데도 아무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지은 두번째 죄, 바로 그 현실에서 아무일도 하지 않은 죄입니다. 아이들이 경쟁과 생존의 나락에서 신음하고 있는데도 아무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거리에 나가 찬 바람을 맞으면서 헤매는 아이들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가출하고 자퇴하고 그들이 걸어가는 인생길이 마치 모든 것이 끝난 길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또 다른 인생길>이거나 <새로운 인생길의 개척>이거나 <나와 다른 삶을 살려는 아이들>의 모습은 알지 못했습니다. 오직 정해진 틀과 룰에서 어긋나지 않고 꼴찌로라도 붙들어두는 정성만을 교사의 사명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걷고 싶은 새로운 길이 있었고, 아무도 걷지 않았던 황무지길을 처음 걷는 아이들의 모험과 도전을 나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3. 이별할 것 세엣: "부끄러워 할 것을 부끄러워하지 못한 일"
그 아이가 죽었습니다. 전날까지 함께 수업하였던 그 아이가 죽었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그 아이를 소외시켰고, 누구도 그 아이의 아픔에 전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아이의 죽음을 그저 신문사회면의 어느 학교의 일로 여겼습니다. 바로 지금 내 앞에서 내가 만났던 그 아이의 죽음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바로 먼 나라 먼 학교의 어느 한 아이의 의지의 나약함으로 그아이의 죽음을 바라보았습니다.
아직 나는 그 희생된 자의 죽음을 교사의 책임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오직 그 아이 개인의 문제로만 읽었습니다. 아이의 죽음을 아이개인의 의지의 문제로만 읽어내는 것 만큼 오만함과 거짓은 없습니다. 바로 내가 만난 그 아이가 죽었는데도 나는 슬픔을 읽지 못하였습니다. 방금 얼마전까지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일에 오히려 협조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죽음에 내가 직접 가담하지 않았어도 책임을 느껴야 할 교육현장의 모습을 보면서 내 말과 내 행동은 전혀 반성의 기색이 없었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후안무치였습니다.
오히려 나는 그 일을 대상화시켜 바라보았으며, 사물화시켜 <그저 그런 한 사건>으로 치부하였습니다. 아이가 죽은 후 교육현장의 일상이 또 찾아왔으며 나는 습관처럼 수업을 하였고, 부끄러운 일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낯 두꺼운 말만 늘어놓았습니다.
내가 지은 세번째 죄,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죄입니다.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교육현장의 무뎌진 도덕성을 보고도 반성하지 못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 침묵과 굴종을 요구하면서 단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무사안일형의 삶에 부끄러워 하지 않았습니다.한 아이의 죽음앞에서 이미 무뎌진 도덕적 감수성은 부끄러움 대신 뻔뻔한 자만심으로 변했습니다. 또 다른 아이들의 슬픔이 가슴에 새겨지는데도 부끄런 마음없이 또 다시 교사임을 자처하고 있었습니다.
4. 이별할 것 네엣: "오만한 몽상과 꽉막힌 전망"
꿈을 꾸었습니다. 내 안에는 먹머루빛 아이들의 눈망울이 없었습니다. 내 계획과 의도된 형태의 꿈만이 들어있었습니다. 아이들로 부터 나온 교사인 나의 꿈과 가르침은 없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교사인 나를 위한 교육이었습니다. 아이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꿰뚫는 꿈을 꾸도록 단 한번도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교사의 일방적인 위안과 욕심만을 위한 교육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삶을 사랑하고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열정과 정성을 지닐 수 있도록 협조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자기 삶을 만들어가는 일을 게을리 할때 나는 오만함과 위선속에서 내 이익과 만족만을 추구하였습니다.
아직은 교육이 아이들에게서 나와서 아이들 한테 이루어지는 일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교육이 아이들 스스로가 행복을 추구하면서 자기의 삶에 자부심을 갖는 일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내가 죄은 네번째 죄, 오만한 꿈속을 헤매면서, 아이들 스스로가 자기 삶의 전망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지 못한 일입니다. 아이들의 시선이 위로만 향하고 있을때 옆으로 향할 수 있는 수평적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였습니다. 아이들의 삶의 문제가 교사인 나의 이해와 이익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아이들은 꽉막힌 전망아래 당장 눈앞의 점수와 편안, 안락함에 길들여져 갔습니다
5.이별할 것 다섯: "무관심 또는 관심의 포기"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이 미워지고, 가장 가깝게 지낸 친구가 남보다 더 미워지는 날이 많았습니다. 아주 작은 상대의 실수가 맷돌만큼 무겁게 보이고, 아주 사소한 말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파는 칼날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내가 얼마만큼 더 넓어져야 하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고, 그 누군가를 생각하며 이해할 겨를 조차 갖지 못하고 지낸 세월이었습니다. 아주 어리석은 날들의 일상이 반복되었습니다.
바로 내 앞에 있는 교사와 아이들이 미워지고, 그 말 한마디에 서운해질때, 나는 상대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점차로 무관심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내 마음이 불편한 것을 참지 못하였고, 아주 많은 것들을 포기하면서 매일 매일을 <그냥 스쳐지나가는 전철안의 승객>들로 인간관계가 헐거워졌습니다. 잠시 함께 전철을 타고 가지만 문이 열리면 서로 각자의 이익을 위해 떠날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흩어지는 모래알을 닮은 군상으로 살아왔습니다.
아직은 자신의 마음을 갈고 닦는 일이 왜 중요한지 몰랐습니다. 자신의 마음밭에서 자라고 있는 잡초를 솎아내고, 앙칼한 곡식을 가꾸기 위해 흙을 두둔하게 모으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관심의 포기 만큼 세상을 삭막하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자기 삶에 대한 관심과 열정의 상실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입니다. 권태와 나태한 습성만큼 마음을 병들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세상살이에서 바로 그 누군가를 향하는 관심을 끊는 일만큼 무서운 일은 없습니다. 상대에 대한 무관심과 관심의 포기는 <악의 꽃>입니다. 무관심만큼 마음을 병들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내가 지은 다섯번째 죄, 사람들에 대한 관심의 포기와 무관심입니다. 미움조차 사랑일 수 있고, 관심의 지속성만이 내 앞에 앉은 미운 사람을 껴안을 수 있습니다. 그 미운 사람조차도 함께 교육을 하는 또 하나의 교사이며, 내가 교육하는 아이들이란 사실을 몰랐습니다.
6. 이별할 것 여섯: "게으름"
아이들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고 그 누구도 아이들이 행복해지는 데 방해할 권리는 없습니다. 단지 불행한 상태를 잠시 잊게 해주는 임시방편의 위안이나 위로만을 하였습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자기 삶의 행복을 실현하도록 도와주는 일을 게을리 하였습니다.
나쁜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는 문제를 풀 수 없었습니다. 나쁜 일에 매어 있던 그 시간에 바로 좋은 일을 실천하는 아이들로 변하도록 많은 공부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나쁜일은 잠시 눌러 놓으면 언제든지 그 행동양식이 튀어오를 뿐이었습니다. 내가 먼저 좋은 계기로 아이들과의 만남을 주선하지 못하였습니다. 밭의 풀만 뽑아내었지, 그 곳에 곡식이 자라 열매 맺도록 거름을 주고 지짓대를 세워주지는 못했습니다.
아이들의 행복한 삶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에 동참하지 못한 채 게으름을 피웠습니다. 단지 억압적이거나 강제적으로 그 행동을 내 눈앞에 보이지 않도록 감추도록 하는데 지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나쁜 행동이 내 눈앞에서 사라지게 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내 감시의 눈이 사라진 곳에서 나쁜 행동은 다시 나타났습니다. 나는 아이들을 이중인격자로 만드는 무척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내가 보지 않아도 자기 스스로가 좋은 행동을 하도록 자생력을 길러주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나쁜 행동이 나타나지 않는 일에만 매여있었습니다. 내 눈이 없는 곳에서도 자기 삶의 전영역에 좋은 가치를 실현하도록 자발적인 수양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전하지 못하였습니다. 적극적으로 좋은 일을 하는 아이들을 교육하는 일에 나는 게으름을 피웠으며, 좋은 가치를 알지 못한채 무지속에서 헤맸습니다.
아이들을 방치하는 않는다고 말만 하면서, 아이들을 내버려두었습니다. 아이들 스스로가 어떻게 되든 살아갈 것이라고 무책임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미 내말을 듣고 내 행동을 본 아이들이었습니다. 내 말과 행동을 통해 아이들은 보고 배우고 있었습니다. 이 사회의 살아갈 방법과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의 사회적 책임이 무척 중요했습니다.
내가 지은 여섯번째 죄, 좋은 가치를 실천하는데 게으름을 피운 죄입니다. 단지 나쁜일이 내앞에서 일어나지 않았다고 자만하고, 나쁜 행동이 내눈에 보이지 않았다고 안심하였습니다. 내 눈 앞에서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교육에 문제가 없다는 나태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좋은 가치를 적극적으로 실현하는 교육의 중요한 활동을 내 자신부터 하지 못하였습니다. 아이들이 나쁜 일에 매였던 그 시간에 좋은 일을 실천하는 아이의 자발적 행동을 이끌어 내지 못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