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에 대한 예의
아픔에 대한 예의
1. 정호승의 <슬픔이 기쁨에게>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깍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2. 부러진 나뭇가지, 시든 꽃, 얼어죽은 꿈, 찢어진 책, 깨진 유리창은 아픔이 없다. 껍질 벗겨진 나무, 상처난 무릎, 끊어진 거미줄, 얼어붙은 보리싹, 꼭 깨문 어미젖은 몸살을 앓는다. 아픔은 아픔으로 그치는 법이 없다. 아픔은 탄생과 단단함으로 가는 걸음걸음, 그 걸음에 쩍쩍 찍히는 발자욱이다. 군청색 잠바차림의 플라타너스 줄기에서 등비늘이 낙엽처럼 떨어지는 것은 뱃속에서 성장하는 아이때문에 어미 배가 트는 이치와 같다. 낙엽처럼 층층히 쌓인 새벽 안개가 산골짜기로 도망치는 것은 노스님의 눈빛과 일갈에 아픔을 느낄줄 알기 때문이다. 그 아픔 속에서 나무들은 새벽부터 쑥쑥 자라오르며 운다.
3. 울음, 네 얼굴에서 소리없이 닭똥만한 눈물 뚝뚝 떨어질 때 나는 주먹만한 네 아픔을 보았다. 굵은 빗줄기 양철지붕에 쏟아지는 소리처럼 네 울음 커질때 나는 더이상 네 얼굴에서 아픔을 볼 수 없었다. 울음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은 아직 아픔이 적기 때문이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아픔과 말조차 나오지 않는 아픔과 소리조차 꾸억꾸억 안으로 파고드는 아픔이 아직은 없었다.
주먹으로 가슴치기, 네가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망치들고 네 손가락 내려치려는 모습을 볼 때 나는 눈물로 얼룩진 편지지속의 아픔을 보았다. 안으로만 파고드는 너의 아픔에서 세상을 향한 분노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에 주먹질을 해대며 멱살을 잡으려 할 때 나는 네게서 고무신 벗어 땅바닥을 치는 광대의 풍자와 해학을 볼 수 없었다. 가슴에 넣어 우려낸 아픔과 술도가니에 용수를 처박아 걸러낸 슬픔을 볼 수가 없었다. 마알간 동동주같은 그러나 잔잔하게 파고드는 아픔을 볼 수가 없었다. 누룩곰팡이에서 오줌싼 자리처럼 번져가는 그런 슬픔은 없었다. 메주덩이 속 모양없이 썩어가며 은은하게 퍼지는 방안 가득한 아픔의 냄새는 없었다.
4.그렁그렁한 아이의 코에서 아비는 입으로 코를 뽑아냈다. 아이가 시름시름 앓으며 눈가로 번진 눈물자욱을 보면서 아비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밤새 뒤척이며 가슴은 눈물 마른 자리처럼 메말라갔다. 아이가 토해내며 컥컥 울때 아비는 가슴이 찢어지며 담배만 피웠다. 가슴 켠켠히 꼭꼭 밟아두던 아이가 새벽이 되어도 젖달라 보채지도 못할 때 아비는 못을 밟는 아픔이 정수리까지 파고 들었다.
5. 아이의 손을 잡고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리는 세월이 찾아왔다. 두 손 벌려 엎드린 바닥에서 한기가 솟구치고 바닥에 엎드린 자의 뼈속까지 얼어붙을 때 아비는 "100원만!!" 하는 말을 듣지 못했다. 땅바닥에 얼어붙은 볏짚처럼 뽑아낼 수 없는 무정함만이 아비의 가슴을 채우고 있었다. 무정함, 그 끝을 잡고 당겨 보지만 툭 끊어질 뿐이었다. 길에서 얼어죽은 간밤의 동사자가 거적에 덮여 싸늘함으로 다가올때 아비는 자기의 내의를 챙겨입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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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은 내 몸과 마음에 집을 정하고 산다. 내몸에 기거하는 아픔은 내 몸이 안다. 내 마음에 기거하는 아픔은 아픔에 대한 예의를 갖출때 느낄 수 있다. 아파할 일을 더 이상 아파할 수 있는 가슴이 없다면 단단함이나 탄생으로 가는 길목에 들어설 수 없다. 오늘 아침 툭 툭 언 땅에서 솟아오르는 새싹의 아픈 울음소리와 푸더덕 둥지를 차고 오르는 어린 새들의 아픈 비명소리를 듣고 싶다. 아픔에 대한 최소한 예의를 갖추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