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 태어남: 단군 신화 그 이후
< 거듭 태어남: 단군 신화 그 이후>
1.
환인의 아들 환웅이 늘 천하에 뜻을 두어 인간 세상을 탐구하였다. 이에 환인은 환웅의 뜻을 알고 아래로 삼위 태백을 내려다보매 가히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할 만하였다. 이에 천부인(하늘에서 내려준 인장이나 증표) 세 개를 주어 내려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3천명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 내려와 그곳을 신시라 이름하였다. 그리고 바람, 구름, 비를 관장하는 자들을 거느리고 곡식, 질병, 목숨, 형벌, 선악, 등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의 일들을 주관하여 인간 세계를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이 때 곰과 호랑이가 나타나 인간이 되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환웅이 그들에게 쑥 한 줌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곰과 호랑이가 이것을 받아먹고, 곰은 21일만에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호랑이는 삼가지 못해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여자가 된 웅녀는 더불어 혼일 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배게 해 달라고 빌었다. 이에 환웅은 사람으로 변신한 뒤 웅녀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삼국유사에서>
2.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은 '거듭 태어나는 존재들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곰은 자신의 존재전이를 꿈꾸었습니다.자신의 존재가 곰에서 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고통만이 존재하는 동굴 속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그 동굴은 가장 힘든 상황적 조건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제 형상조차 볼 수 없는 어둠이 있었고, 등짝에 달라붙은 배고픔이 있었으며, 살을 에이고 뼈 속까지 파고드는 추위가 있었습니다. 어둠과 동굴의 결합은 그 속을 찾는 곰에게는 공포 그자체였습니다.
하지만 곰은 자신의 존재변화를 위해 어려운 상황적 조건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결단을 감행하였습니다. 곰은 인간으로 탄생하기 위하여 배고픔과 추위, 불편함과 공포가 존재하는 생활의 조건을 스스로 선택하였습니다. 곰은 존재변화의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힘든 상황을 선택하였습니다. 곰은 변화가능성에 대한 기대만을 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미래의 희망에 대한 긍정적인 해답만이 곰을 지켜줄 수 있었습니다. 곰이 딛고 설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신의 미래가 변화할 것이라는 믿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곰에게 동굴속의 생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둠의 동굴 속에서 100일 이라는 시간'은 곰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동굴속의 시간은 자기를 미워하면서도 그 미움조차도 감싸안아야 하는 자기연민과 자기부정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굴 속의 100일>은 곰에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는 <탄생의 공간이자 기회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동굴속의 생활을 견디면서 곰은 쉬고 싶고, 배부르게 먹고 싶고, 잠자고 싶은 자신의 본능과 싸워야 했습니다. 또 본능의 결핍이 가져오는 한계 상황에 다다를수록 지레짐작 '자포자기'하려는 마음과 싸워야 했습니다. 이미 포기하고 떠나려는 호랑이를 뒤쫓아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을 때는 치열한 전투병처럼 자신과 싸웠습니다. 본능의 결핍, 자포자기의 마음, 도망치고 싶은 충동 중에서 가장 힘든 일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 이겨내는 일이었습니다. 곰 자신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존재변화의 불확실성, 그로인한 불안정한 정서', 그리고 어려운 과정의 견딤이 '과연 좋은 결과를 보장할 수 있는가'하는 '실패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운 마음'과 싸워야 했습니다.
마음에 '조그만 방심'과 '허튼 마음의 틈'이 생기면 '과연 자신이 선택한 길이 잘못 선택한 길은 아닐까'하는 존재의 불안과 직면하였습니다. 그 때마다 곰은 외로운 결단을 해야 했으며, 사막을 혼자 걸어 가야 하는 막막함에 괴로웠습니다. 소리라도 마음껏 지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울부짖어도 소리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울부짖는 소리를 낼 수 있어도 그 울부짖는 소리는 혼자 들어야 했습니다. 아무리 울부짖어도 소리조차 나지 않았고, 어쩌다 울부짖어도 그 울부짖는 소리는 자신밖에 들을 수 없는 메아리로 되돌아 왔습니다. 되돌아오는 울림을 안고 견디는 실존은 차라리 무서움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들어줄 리 없는 울부짖음이 다시 자신 속으로 파고들 때마다 그는 '삶의 견고한 고독"에 마음이 외로웠습니다.
곰에게 쑥 한줌과 마늘 스무 쪽이라는 외부조건의 열악함은 그래도 견딜만 했습니다. 차가운 동굴은 그래도 차가운 지성을 훈련할 수도 있었습니다. 어둠의 장막은 그래도 또렷한 의식을 잉태하기도 하였습니다. 배고픔, 추위, 그리고 어둠은 그래도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용기를 허락하였습니다. 하지만 곰의 마음은 무척 흔들렸습니다. 그 불리한 상황을 탓하면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염려와 불안 "은 너무 버거웠습니다.
그러나 곰은 단 한 가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저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변화에 대한 열정과 정성>밖에 없었습니다. 힘들어하면서도 온 정성을 다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차라리 사랑하였습니다. 힘들어하면서 못나고 일그러진, 그래서 아주 나약한 모습도 자신의 일부분으로 여기고 껴안았습니다. 곰은 자신의 <나약함을 껴안으면서 미래에 대한 정성을 기울이는 일>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3.
곰은 어려움을 단순히 참아낸 '인내의 화신'으로만 그려질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곰은 <자기 변화의 시기>를 적극적으로 선택하여 "거듭 태어남"의 노력을 기울이는 운명의 개척자였습니다. 주어진 운명의 화살을 맞고 쓰러져 <어쩔 수없이 살았던 존재>가 아니라 <자기 삶을 선택하여 책임을 지는 실존의 개척자>였습니다. 곰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스스로 염려하고 결단하는 자유와 책임을 지닌 존재였습니다. 선택의 과정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느꼈지만, 자기의 기획과 의도를 스스로 구상하여 설계를 하고, 실천해 내는 <행동하는 자유인>이었습니다.
곰은 "노력의 지속성과 정성의 온전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구체적으로 실천하였습니다. 곰은 "자기 변화의 정성과 노력"을 거친 후에야 자신 속에 웅크리고 있던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곰은 <100일이라는 신화탄생의 시간과 공간>을 스스로 찾아 들어 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곰은 자신의 가능성을 입체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었습니다. 만약 곰에게 고통과 불편함을 견뎌냈던 <신화 탄생의 기회>가 없었다면, 그는 '하고 싶은 소망'을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전환시키고, '가능성'을 '현실'로 증명하는 일은 일어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운명을 개척하는 동굴의 어둠이 있었으므로 곰은 <자기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4.
곰이 인간으로 거듭 태어난 이후로 인간은 끊임없는 <자기 변화와 거듭 태어남>을 도전해오고 있습니다.이제는 우리에게 그 도전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이제 거듭 태어나야 할 당사자들이 되었습니다. 제2의 탄생은 이제 바로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내야 할 <눈앞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 현실은 내 삶을 가로막는 장애물도 아니고, 도망치고 싶은 현실도 아닙니다. 다만 자기 운명을 개척할 기회와 계기로서 찾아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기 변화를 시도했던 신화의 공간과 시간"을 스스로 선택하는 일만이 남았습니다.
<자기 변화가 가능한 신화의 창조>, <삶의 응축된 집적물들의 질적인 변화>, 결국 우리는 <삶의 비약>이 가능한 다리 앞에 서 있습니다. 그 다리는 우리가 건너야 할 다리입니다. 비껴 갈 수도 없고 돌아갈 수도 없는 삶의 유일한 다리입니다. 천천히 한 걸음을 옮겨 놓아야 합니다. 다리를 건너기 위한 첫 한걸음으로 우리 삶은 변화할 것입니다.
5.
우리는 살아가면서 삶의 어느 한 시기를 <자기를 거듭 태어나게 하는 신화의 공간과 시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바로 지금의 <이 상황과 이 상태에서 주저앉아 울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내 인생을 알고 있으며, 지금까지 고민한 삶의 날들이 너무 아깝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사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습니다.
분명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은 우리에게 외로움과 불편함을 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거듭 태어남"의 계기가 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꿈과 가능성, 정직한 소망"을 줄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거듭 태어남>의 변화를 추구하면서 자신에게 예외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것은 "희망 있는 패배"와 "가능성 있는 좌절"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