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서 가을로
봄에서 가을로
1. 그 해 봄
-누나가 눈 녹듯 사라지던 그 해 봄 새벽,
어머니가 물었다.
“오늘 새벽에 닭이 울지 않네요. 간밤에 횃 치는 장 닭을 어둠이 잡아 갔나 봐요.”
아버지는 대답하였다.
“무슨 소리여? 닭이 새벽에 울지 않으면 언제 울겠는가? 기다려보세.”-
봄이 오는 바닷가 언덕
물구나무 선 병아리 같은 개나리꽃이 피고
입을 앙다문 목련 꽃 송이
핏기서린 눈의 매화는 취객처럼 노려보았다.
막다른 골목 길을 닮은 아버지의 얼굴은
죽은 지 한 달 정도 지난
고양이 같은 잿빛 하늘로 변하고
툇마루에 앉아 누나를 기다리던 어머니는
모눈종이의 직선에서 길을 잃은 콤파스처럼
뾰족하게 말라갔다.
세상은 너울처럼 출렁이다 잠드는 곳
삶은 언덕에서 기다리며 언덕 너머를 바라보는 일
봄이 오는 바닷가 빨간 지붕의 집,
나는 울타리로 서서 귓불 빨갛게 언 동백처럼
봄볕에 얼굴을 태웠다.
봄이 오면
자꾸 누나가 끓여주던 멸치국물 우려낸 국수가 먹고 싶었다.
2. 봄과 가을 그 사이
당신이 보고 싶던 시간 만큼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등불달린 주막에서
회초리 같은 슬픔 세 잔과
유리창에 비친 추억 세 잔과
까치밥처럼 매달린 감 같은 우정 세 잔과
싸리꽃처럼 화사한 수다 몇 잔과
구철초처럼 서러운 어머니의 얼굴 몇 잔
그리고 슬리퍼 신은 생활 한 병을 마셨다.
3. 그 후 가을
당신이 보고 싶으면 문득 가을이 왔다.
당신 때문에 나는
우물에 비친 파란 하늘이 되고
담청색 야전잠바차림의 은행나무가 되고
장독대 항아리에 기대어 조는 햇살이 된다.
사는 일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그 무엇으로 변하는 것
당신이 보고 싶으면 성찰 없이 성장한 여름은 껍질로 메말랐다.
당신 때문에 나는
찬바람을 맞고
아이와 눈을 맞추며 손을 잡고
사람들 마음으로 걸어가는 길을 만든다.
사는 일이란
사랑을 받으면서 사랑하며 사는 즐거움을 발견하는 것
당신이 보고 싶으면 내 마음은 곱게 물들며 기도를 하였다.
........내 오랜 사랑아
몸 맘 다 아프지 마라
아픔은 내가 대신 겪어주마.............
이제 당신은 주먹만한 모과 향처럼 코끝에 시리게 매달려 사랑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