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군자
동쪽의 봄 매화(梅)
낫 같은 초승달이 바람을 가르면 별은 잰 걸음으로 총총하게 대오를 정렬하고, 바람은 사천왕의 눈을 피해 山寺의 뜰에서 한바탕 사나운 춤사위를 펼친다. 뜰 앞 매화는 언 손 터뜨려 손가락 안에 붉은 피를 모아 오므린다. 밤새 싸락눈이 내리고 달빛마저 꽃망울에 붉게 얼어붙는 봄밤, 매화는 옹그랗게 주먹을 쥐고 까까머리 스님차림으로 머리 풀어헤친 바람 속 봄볕을 마중하러 떠난다. 단청처럼 울긋불긋한 꽃잎, 풍경처럼 흔들리는 매화의 생애, 걷는 걸음마다 날리면, 꽃잎 진자리에 매화 향 돋아나고 고요한 봄볕 들어 눈은 거침없이 녹는다. 봄볕 속에서 아버지는 눈보다 빨리 동쪽으로 스러졌다.
남쪽의 여름 난초(蘭)
그늘진 여름 숲을 건너편으로 바라보며 산골짜기 볕드는 비탈에 선 난초, 아득한 낭떠러지도 모자라 한 번 더 굽어 내려 본다. 낭떠러지로 구르는 꿈을 몇 번이나 꾸다가 별빛에 놀라 눈을 뜬 뒤 계곡의 아침을 맞는다. 서늘한 안개가 저 밑에서 차고 오르면 입술은 바들바들 떨리고 온 몸은 빳빳하게 굳는다. 앙다문 꽃대에서 고개를 비집고 새순을 내민다. 단순하고 잔잔한 난초의 탄생, 잔잔해서 밋밋한 생애, 밋밋하게 눌러앉는 바람으로 더 휘어지는 잎새, 곡선을 따러 번지는 싱거운 향, 싱거울수록 떠날 수 있는 단순함, 단순하게 가벼워지며 조용하게 산을 오른다. 산은 난초 향에 취해 누울수록 난초 잎을 닮은 등성이를 만든다. 남쪽 바닷가 비탈에 선 오래 된 어머니의 조용한 삶이 한 손으로 그 낭떠러지를 붙들고 끝끝내 매달려 있다.
서쪽의 가을 국화(菊)
서쪽 하늘에서 은행알 같은 노을이 쏟아지는 늦가을 저녁, 곡식 거둔 들판 논밭의 낟알 위에 하얗게 서리 내리면 숲은 그 많은 잎을 떨구며 숲의 내장을 보여준다. 도토리가 여문만큼 강물은 차가워지고 나의 사랑은 말이 없어진다. 무른 논에서 무릎걸음으로 주운 알곡이 말라가는 일처럼 내 삶에서 기쁨, 슬픔, 아픔, 걱정이 말라간다. 사랑은 첫눈 오는 소식만큼 반가우며, 이별조차 장바구니 이고 산모퉁이를 돌아오는 어머니처럼 그립다. 청솔가지 타는 연기가 가득 번지는 늦가을 저녁 감나무 홍시가 위태롭게 매달려 까치를 기다리면, 들판은 비바람에 흠씬 두들겨 맞으면서도 땅속으로 뿌리를 질러 넣고, 천둥치면 고운 음을 듣고, 번개 빛나면 몸단장하여 핀 들꽃을 품는다. 맨 나중의 늦가을, 가장 늦은 저녁까지, 가장 오랫동안 향을 내는 국화, 가장 오래전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오랫동안 단 한 번 피는 꽃, 그 향기가 되고 싶어 나는 첫 골목의 첫 술집에서 수줍은 술을 마신다. 국화차가 되어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 얼핏얼핏 감기고 싶다.
북쪽의 겨울 대나무(竹)
집 뒤 겨울 산에 눈이 오면 잣나무는 손마다 벙어리장갑을 끼고 바위는 검버섯을 드러낸다. 눈이 오면 길은 사라지고 소리만 남는다. 화들짝 날아 성급하게 가시덤불로 내려앉는 꿩, 힘없이 날아올라 소나무 가지를 붙드는 산비둘기, 수수이삭 같은 붉나무 열매를 뜯어먹는 박새들, 무리로 날며 씨앗을 퍼뜨린다. 겨울 산은 모로 누워 침묵하지만 실 옷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요란한 소리를 낸다. 겨우내 북쪽 한계령에도 목화솜 같은 함박눈이 내리고, 태백산 주목에도 눈꽃이 피고, 장독대 뒤 대나무 숲에도 까치 떼처럼 눈이 날아든다. 눈이 오면 길은 사라지고 소리만 남는다. 저벅저벅 눈길을 걷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린다. 문고리에 손 쩍쩍 달라붙는 아침 누군가 걸었던 눈길을 따라 내가 걷고, 몇은 또 내 발자국을 따라 걷는다. 눈길마다 짙고 탁한 농담으로 질척질척 묵죽을 치는 발자국 소리에 놀라 새떼가 찬 하늘로 날아오른다. 하얀 땅 위에 아버지 등에 새긴 지게 자국 댓잎이 돋고, 벼랑 끝 매달렸던 어머니의 손가락 댓잎이 돋고, 첫 골목어귀에서 국화차를 끓이는 저녁 같은 댓잎이 돋는다. 눈 속에 누웠던 댓잎들이 모두 고개를 쳐들어 걸어도 남지 않는 발자국, 녹을 수 있을 만큼 꼭 그만한 인연으로 걷는 길을 알려준다. 눈 온 길 발자국 소리를 내며 하얀 여백처럼 고요한 침묵의 소리를 배운다. 대나무 그림자 뜰을 쓸어도 먼지일지 않고, 둥근 달이 연못에 들어도 물에 흔적이 없듯 걸어도 소리 내지 않는 법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