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일암, 그리고 아래로 내려가는 꿈
"꿈을 위로만 꾸지 말고 옆으로도 나아가며 아래로도 내려가는 꿈을 꿀 줄 알아야 한다."
꿈을 위로만 꾸지 말고 옆으로도 나아가고 아래로도 내려가는 꿈을 꿀 줄 알아야 한다. 위로만 오르는 꿈은 밟는 존재와 밟히는 존재라는 실존의 구조를 가지기 때문에 비인간적인 삶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지배자의 기쁨은 피지배자의 눈물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위로만 오르는 상승의 꿈은 딛고 오를 수 있는 기반, 즉 밟히는 존재가 있을 때만 그 위에 설 수 있다. 결국 수직 상승 꿈이란 밟고 오름 또는 딛고 일어섬이란 실존 구조를 통해 이루어지므로 아무리 높은 꿈에 도달하였더라도 그 삶은 허망하고 비인간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옆으로 나가는 "게의 걸음을 닮은 꿈"과 아래로 내려가는 "물의 흐름을 닮은 꿈"이 절실히 필요할 뿐이다.
지금 우리는 경쟁에서 이겨 밟고 올라서는 꿈에 익숙한 종족으로 변하였다. 위로만 오르는 꿈이 가장 편안한 옷처럼 우리에게 너무도 편한 가치관으로 자리잡았다. 오히려 옆으로 나아가는 꿈이나 아래로 내려가는 꿈은 값어치 없는 골동품 취급을 받거나 아니면 시대의 낙오자로 떠밀려간 사람들의 궤적으로만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시대의 모순을 무디게 하는 '착한 바보'의 선택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현실은 가장 높이 오르고 가장 많이 소유하고 가장 편하게 살고 가장 풍요롭게 소비하기 위한 삶만을 강요하고 있다. "소유와 소비"의 삶만이 있고 "나눔과 창조"의 삶만은 사라져 가고 있다.
어린 시절에 읽은 트리나 포올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이 있다. 위로만 오르려고 하던 애벌레가 동료를 밟고 오르는 상승의 허망함을 깨닫고, 나비가 되어 날개를 달게 되는 과정을 자세하게 그린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상승의 꿈과 수평의 꿈이 어떻게 다른 가를 알 수 있고 참된 존재로 거듭 태어나는 꿈의 모습을 알 수가 있다. 참된 존재는 위로만 오르는 꿈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와 자신 속에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여 실현하는 존재이다. 마치 애벌레가 나비가 될 가능성을 발견하고 고치를 지어 나비로 거듭 태어나는 모습을 닮고 있는 존재이다. 이 책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에 해당한다. 이 책에서 애벌레가 꽃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은 "애벌레에서 나비로 존재이전을 하는 일"이다. 애벌레가 나비로 거듭 태어날 수 있는 것은 애벌레가 다른 친구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승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서 나비가 될 가능성을 스스로 발견하여 실현하는 "자기사랑"에 있다.
위로만 오르는 꿈은 자기를 돌아보면서 성찰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옆으로나 아래로의 꿈은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충분히 허락한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려면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밟느냐 밟히느냐는 생존의 경쟁 더미에서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 마음의 여유는 주머니에 담을 정도의 아주 작은 여유만 있으면 된다. 가슴에 푸른 가을 하늘을 한 조각만 담고 사는 조그만 여유로움이면 된다. 그 작고 조그만 여유만 있으면 단순히 먹고사는 것 보다 더 나은 생활에 대한 동경을 할 수 있고 자신 속에 숨어 있는 <가능성과 잠재성>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우리는 지금까지 꿈을 꾸는 방법이 거꾸로 꾸어온 모습이었다. 우리들이 꿈꾸었던 방법은 위에서 아래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향하는 방법에 익숙해 있다. 크고 높은 것만이 귀중하고, 작고 낮은 것은 비천하게 여기는 어리석은 판단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릴 적부터 사회적 명예와 경제적 풍요로움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꿈을 만든다. 어릴 적부터 평범한 현재와 '익숙한 살림살이'를 부정하는 데 길들여진다. 판사 변호사 박사 등 사자 돌림의 직업들을 최고의 꿈으로 여기면서 그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라도 맞서 그 꿈을 이루고자 애쓴다. 과연 가장 좋고 훌륭한 꿈인가란 질문은 높은 곳에 도달하는 데 발을 거는 옹이일 뿐이다. 나와 남이 함께 좋은 꿈을 추구하면 내 개인의 최고의 꿈은 사라져 버리기 쉽다. 어릴 적 우리의 꿈은 대통령을 꿈꾸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 다음은 판사 그 다음은 변호사 그 다음은 장군, 그 다음은 육사생도, 그 다음은 공무원, 그 다음은 사업가, 그 다음은 그저 평범하고 안정된 직장 생활, 그 다음은 ...........너무 큰 명예와 높은 사회적 지위를 자신의 꿈으로 내면화하면서 치열한 경쟁을 배우고 희망 없는 패배를 경험한다. 그런 후에는 작아진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고 실패한 자신의 꿈에 한탄하고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향수만을 술자리 안주 삼아 살아간다.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훈련받으며 결국에는 자기를 미워하는 데 익숙해진다. 크고 높은 꿈을 추구하면서 배운 것은 자신을 미워하는 일이고 자신에 대한 열등감을 내면화하는 일이다. 바로 옆에 있는 작고 하찮은 것들은 빨리 훌훌 털어 내야 할 먼지일 뿐이고 바로 지금 만나는 못생기고 단점 많은 가족들은 버려야 하는 인습의 옷일 뿐이고 바로 당장 내 안에 존재하는 아픔과 상처는 감싸안아서는 안 되는 도깨비불 같은 것이다. 작은 것, 보잘 것 없는 것, 아픈 것, 찌그러진 것, 울퉁불퉁한 것, 모난 것, 굽은 것에 대한 애착은 미래를 누릴 자격을 뺏긴다.
수직상승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언젠가는 내려오게 마련이다. 위로만 오르는 계단식 꿈도 언젠가 처절한 내려옴의 시간을 맞는다. <크고 높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꿈꾸던 배고픈 날들의 꿈은 이제 접어야 한다. 이제는 <작고 낮으면서도 마음에 꼭 맞는 것>을 꿈꾸어야 한다. 이제는 아래로 내려가는 "물의 흐름을 닮은 꿈"을 꿀 줄 알아야 한다. 물은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면서도 온갖 만물에게 영양분을 제공한다. 그러면서도 거침없이 자유롭게 흐른다. 우리의 꿈은 물의 흐름을 닮아야 한다. 또한 우리의 꿈은 옆으로 기어가는 게의 걸음을 닮아야 한다. 넓은 곳을 보고 조근 조근 걸어가는 "게의 걸음을 닮은 꿈"을 꿀 줄 알아야 한다. 게에게 있어 높은 중요하지 않다. 얼마만큼 넓이 볼 수 있고 넓게 갈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그러면서도 바닷물의 위세를 다룰 줄 안다. 우리의 꿈은 게의 걸음걸이를 닮아야 한다.
우리는 너무 <크고 높은 것>에 익숙해 있었고 너무 <빠르고 한꺼번에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성급함>에 익숙해 있다. 이제는 꿈을 이루는 삶의 속도가 아니라, 꿈을 이루면서 살찌우는 삶의 높이와 깊이가 중요하다. 꿈의 시작은 조그맣고 자그마한 것에서 출발한다. 꿈은 조그만 삶의 동기에서 출발한다. 꿈은 작은 삶의 소망에서 출발한다. 마치 로봇을 가지고 놀던 어린아이가 로봇 고치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하여 나중에 훌륭한 엔지니어링이 되는 이치와 같다. 조그만 도토리 씨앗이 큰 참나무로 변하는 이치와 같다. 로봇 고치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 순간에 의해 인생전체의 방향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어느 한 순간 삶에서 얻은 동기와 선택은 결단과 시작으로 이어지고, 실천과 지속적 노력을 통해 삶은 완성된다. 인생의 꿈도 작고 조그만 동기에서 출발하지만 그 결실은 훌륭한 모습으로 완성될 수 있다. 로봇을 가지고 놀던 어린 아이가 고장난 로봇에 실망하고 로봇을 고치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 순간이 있다. 이 순간이 그 아이의 인생전체의 방향을 잡는다. 그 어린아이는 점차로 로봇을 고치기 위해 기계의 원리를 배울 것이고, 그 다음은 물리적 법칙과 화학적 반응 등을 배울 것이며, 그 다음은 어린 아이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기계의 사용 등을 배워 나가면서 훌륭한 엔지니어링으로 성장할 것이다. 우리의 꿈이 이루어지는 과정도 마찬가지이다. 작고 조그만 삶의 선택과 결정에서 출발하여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 꿈이 성장할 것이다. 작고 조그만 것에서 출발해야 꿈을 이루는 과정이 힘들더라도 즐거울 수 있다. 작은 것에 대한 애착이 있을 때, 순간에 대한 애착이 있을 때, 보잘 것 없는 것에 대한 애착이 있을 때만이 함부로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고통을 감내하라고 이야기하지 못한다. 미래의 환상을 위해 우리들은 얼마나 자신의 현재의 삶과 감정과 생각을 억눌렀는지 잘 알고 있다. 미래의 시간에 속아 우리들은 작고 소중한 순간에 만났던 사람들과 작고 소중한 순간에 했던 경험을 잊어버렸다. 이제는 현재의 작고 낮은 것을 하나하나 만나면서 조금씩 천천히 가꾸어야한다. 아주 느리게 걷는 게의 걸음처럼 조근 조근 <느리게 사는 것>의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도 필요한 일임을 깨닫고 평범하지만 작은 일상의 행복에 눈을 돌려야 한다. 아주 작지만 보잘 것 없는 것에 대한 애착에 눈을 돌려야 한다.
얼마 전 아이들의 싸움이 있었다. 오전 두 과목의 시험이 끝나고 교실에서 책걸상을 뒤로 밀쳐놓고 두 아이가 사소한 감정 문제로 싸웠다. 아이들의 감정 다툼은 자연스런 일이고 그럴 수 있는 문제였다. 다만 그 싸움의 상황에서 구경하면서 박수치는 아이들의 마음이 문제였다. 아이들은 '인간링'처럼 두 아이의 주변을 에워싸고 친구들의 싸움을 구경하는 관객이었다. 그 누구 하나 친구의 싸움을 친구의 삶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오히려 재미난 오락이나 구경거리로 여기는 구경꾼만이 있었다. 더 심한 경우는 친구가 얻어맞고 피를 흘리는 상황에서도 숙제와 다음날의 시험 준비를 하면서 친구의 아픔에 무관심한 아이들이 있었다. 그 상황 속에는 높이 오르기 위한 꿈이 빚어내는 모멸찬 생존의 게임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가 자신의 이익과 안락함만을 추구하면서 친구의 싸움은 그저 장난일 뿐이었다. 그 모습에서 나는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 왜냐면 꿈을 아래로도 꿀 줄 알아야 한다는 내 생각과 말은 말장난에 그칠 뿐이었다. 오히려 높이 오르려는 경쟁의 더미에서 옆으로 새어나오는 애벌레들을 만들어 결국은 위로만 올라가는 애벌레의 경쟁률을 낮추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날 싸움 현장에 있던 아이들을 데려다가 상황을 물어 보았다. 하지만 대부분이 "나는 아무 잘못이 없고, 그 상황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하는 말을 서슴치 않는다.'아니 친하지 않더라도 약한 친구가 맞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있었다니..........'나는 그 무관심이 더욱 무섭다. 높이 오르기 위한 꿈의 상승욕구 속에서 친구의 불행이나 아픔은 관심 밖의 문제로 치부해 버리는 아이들의 이기심이 무섭다. 아주 오래된 유럽의 영화 중에 <로베레 장군>이라는 영화가 있다. 2차 대전 말기 독일의 나찌즘에 대항하여 싸우는 이탈리아 레지스탕스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다. 이 영화 속에는 레지스탕스 대원들과 동조자들이 처형을 앞두고 한방에 갇혀 있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한 동조자가 "나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면서 울음을 터뜨린다. 바로 그 때 옆에 있던 지도자가 말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이 바로 당신의 죄이다." 그렇다. 떼지어 몰려들어 한 친구를 괴롭히고 약한 친구는 엎어져 맞고 있는 데도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아이들이 잘못이다. 아니다. 아이들의 무관심이 잘못이다. 이것도 아니다. 아이들의 무관심을 부채질하고 오직 위로만 올라가는 꿈을 꾸도록 강요한 우리들 모두가 잘못이다.
만일 우리 자신들이 옆으로도 꿈을 꿀 줄 알고 아래로도 꿈을 꿀 줄 알았더라면 아이들은 약한 친구가 맞는 상황에서조차 내일의 내 시험점수를 올리기 위해 자신만의 공부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책을 잠시 미루고 약한 친구를 돕거나 친구의 싸움을 말리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오직 신분상승의 가파른 질곡 속에서 살아 남아야 하니 위만 보일 뿐이었다. 위로만 오르는 꿈의 구조에서는 옆을 보거나 아래를 돌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란 존재할 수가 없다. 친구를 밟고 올라서야 하고 그 경쟁의 더미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친구가 싸우든 약한 자가 짓밟히든 상관할 일이 아니다. 자신의 수직 상승과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 돌보아야 한다. 자신에게 손해 되는 일은 끼어 들지 말아야한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희망을 걸수 있는 것은 꿈을 위로만 꾸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꿈을 옆으로 꾸고 아래로 꿀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일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