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령 옛길 어명정 : 길 떠난 자의 노래
길 떠난 자의 노래
누가 등을 떠민 것도 아닌데 길을 걷고 있습니다. 누가 오라고 손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걸어왔고 지금도 걷고 있고 앞으로도 걸어갈 것입니다. 바로 그 곳에서도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날 오전에 길을 떠나는 데 길에 패인 웅덩이에는 진흙탕물이 고여있습니다. 진흙탕에 빠지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피하며 갈지자 걸음을 옮겨 봅니다. 하지만 금방 진흙탕물에 발이 빠집니다.이제는 흙탕물이 가득한 길도 저벅저벅 걸어갈 수 있습니다.그날 오후에는 고속도로를 만나 갈 곳이 훤히 앞길이 보입니다. 앞으로만 걸어갑니다. 뒤돌아볼 필요가 없습니다. 뒤돌아 보아도 땅과 하늘이 잇닿아 있는 지평선만 일자로 누워있습니다. 앞을 보며 언덕위로 넘어오는 바람을 찾아 떠납니다.
늦여름 혼자 걸어가야 하는 오솔길을 만났습니다. 솔숲에서 바람가르는 소리에 귀기울여 봅니다. 밟는 걸음마다 솔잎의 푹신함이 느껴집니다. 꼬불꼬불 할머니 지팡이처럼 길은 이어집니다. 너무 빨리 달려와 참 좋은 풍경을 지나쳐온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바로 그 사람도 길을 걷고 있습니다.
편안한 길이든 험한 자갈길이든 늘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늘 자신의 걸음걸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겨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대신 다른 사람의 길을 걸어줄 수 없습니다. 오직 한 발을 옮기는 수고만이 걸음을 옮길 수 있습니다. 너무 서둘러 걸어갈 수도 없습니다. 함부로 뒤돌아 보면서 걸어갈 수도 없습니다. 너무 서둘러 걷다보면 잘못 걸었던 길에서 배울 것들을 놓치기 쉽습니다. 함부로 뒤돌아보며 걷다보면 제 발에 걸려 넘어지기 쉽습니다.
바로 그 순간 넘어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넘어진 사람은 넘어진 사람만이 일어설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일으켜 세우려 하지만 넘어진 사람이 일어서지 않으려면 축 늘어진 짐덩이가 됩니다. 도저히 일으켜 세울 수가 없습니다. 넘어진 자는 바로 넘어진 그 곳을 짚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앞이 보이지 않아 헤매는 사람이 있습니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안개가 낀 곳에서 사람이 걷고 있습니다. 안개로 뒤덮인 길에서는 손으로 더듬으며 걸어갑니다.하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구분을 할 수가 없습니다. 걸음을 멈출 수 없어 걷기만 할 뿐입니다. 마치 산길에서 길을 잃고 자꾸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상태와 같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으면 걸음을 멈추고 기다리는 방법도 있습니다. 또 다른 방법은 바로 자기가 걸었던 그 발자욱을 뒤쫓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조금 전까지 걸었던 걸음을 걷지 않고 지금까지 단 한번도 걷지 않았던 곳으로 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바로 그 순간 내가 걷는 걸음의 족적이 뚜렷이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눈길을 만나면 발자욱이 선연하게 남습니다. 그런데 함부로 발자욱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눈길에서는 누군가 내가 걸어간 그 발자욱대로 쫓아오는 법입니다.눈길에서는 한 걸음 한 걸음을 내 딛는 일이 그 누군가의 이정표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고 걸어야 합니다. 바로 그 순간에도 길을 걷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