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時節因緣)의 소리 1
시절인연(時節因緣)의 소리 1
아무도 걷지 않은 새벽길을 걷는 발소리, 밭을 가는 황소의 울음소리, 잠든 겨울 산을 날아오르는 멧새의 날개소리,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나기소리, 건넌 방 윗목에서 술이 익어가는 소리, 문풍지를 훑고 지나는 바람소리,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냇물소리, 소의 귀밑에서 나는 워낭소리, 낙타의 턱밑에 늘여 단 방울소리, 풀이 누웠다 일어서는 소리, 끝끝내 넘어지지 않으려 버티는 논벼가 서로 등 부비는 소리, 허리 꺾여 아파하는 갈대의 서걱이는 소리, 빈 밭 빈 논에서 머리 풀어헤치고 달리는 바람소리, 바닷가 돌담 집 울타리로 서서 꽃망울 터뜨리는 동백꽃 소리, 민들레 홑씨 되어 나는 소리, 닭이 홰치는 새벽소리, 교회지붕에서 비둘기 날아오르는 새벽종소리, 산사의 처마 밑에서 흔들리는 풍경소리, 고구마 먹고 떠먹는 동치미 국물 목에 넘어가는 소리, 술 취한 아버지 돌아올 때 화롯불에서 끓는 된장소리, 베개 베고 두런두런 고모와 나눈 이야기 소리 .............
소리 나는 하늘과 땅 사이 사람은 소리를 내고 소리를 들으며 산다. 버리고 비울수록 소리가 들린다.
자갈밭에서 여름 한 낮 돌이 오줌 누는 소리, 대나무 그림자 빈 집 마당을 쓰는 소리, 뒤 곁 처마 밑으로 빗방울 떨어질 때 풀뿌리 드러나는 소리, 뒤집어 놓은 빈 항아리 속에 머물다 가는 바람 소리, 겨울 산 밑 초가집에서 저녁 밥 짓는 연기소리, 책꽂이 오래된 책 위에 먼지 쌓이는 소리, 솔숲에 머물다 가는 달의 숨소리, 비바람에 뺨맞는 사과의 볼 소리, 새의 부리에 찍혀 속으로 아파하며 향을 만드는 모과소리, 자신을 찍는 도끼날에 향을 발라주며 쓰다듬는 향나무 손길 소리, 밤하늘의 별이 총총 모여 우는 소리, 비온 마당을 잰 걸음으로 종종 걷는 고양이의 발소리, 장마당 서면 가마솥에서 김나는 국수소리, 우물에 빠진 달을 퍼 올리는 소리, 막다른 골목에 선 낙엽이 구르는 소리, 이웃집 담 넘어 뻗은 가지에서 떨어지는 감꽃 소리, 빈 항아리 어둠 속 홍시의 어는 소리, 매화가지 끝에 매달려 떨어지는 눈 소리, 석양이 넘어가며 만드는 노을의 슬픈 소리, 저녁 땅거미 내려앉는 어둠의 소리, 눈길과 눈길이 마주쳐 마음의 길이 열리는 소리..........
소리 나는 하늘과 땅 사이 사람은 소리를 내고 소리를 들으며 산다. 나는 세상 살면서 침묵하고 고요한 침묵의 소리 들으며 시절인연을 맺고 싶다.
바람이 분다. 풍경소리가 난다. 새떼가 날아오른다. 하늘이 푸르다. 대숲에 흰 구름이 머문다. 부처님이 웃다가 운다. 소리 없는 시절인연이 매 순간 다가온다. 침묵이 매 사연(事緣) 우여곡절(迂餘曲折)을 만든다. 나는 그 때 그 순간 인연이었다가 우여곡절의 사연이었다가 추억으로 남는다. 나는 바로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 이곳에서 빈 교실 책상으로 남고 의자로 남는다. 나는 입을 다물고 소리를 들으며 침묵하는 법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