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gbu84 2012. 3. 23. 09:38

 

외딴집

 

 

 

 

청솔 타는 매운 인연 사라진 지 오래,

 

만월(滿月)을 누가 밟고 떠났을까

한 쪽 귀퉁이에 발자국만 남아

지붕 위 박꽃은 서럽도록 하얗다

텁텁한 밑술에 취한 달빛은

흰 사금파리에 베였는지

자꾸 비척거리며 흔들린다

 

만삭(滿朔)의 솔숲에서 삭정이 부러진 밤

바람이 물고온 소문은

가마솥 손잡이를 맴돌고

깜부기 눈썹과 까만 눈동자가

새벽에 잉태한 처음의 흰 감꽃,

그 감꽃으로 하얗게 피고 진 누나는

원시(原始)의 죄인이다

 

앙심(怏心)품어 산 세월을

용서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빗질 못한 쑥대머리에 겨우 비녀 꽂은

도깨비바늘은 뼈만 앙상한 헛간에 자라

자꾸 헛간처럼 마른 옛날을 잡아채고

성찰(省察)한 사랑과 헤어지는 일이

얼마나 가슴에인지

마르고 닳은 문턱 그 그늘마다

질경이가 옹기종기 피어

자꾸 흰 사발 푸른 무늬로 박힌다

 

만나면 떠나지 않는 인연이 어디 있을까

약봉지를 올망졸망 매단 처마 밑

시렁에서 싸릿가지 한 다발을 내려

아침의 종아리를 치지만

메주덩이 쩍쩍 갈라진 틈에

곰팡이가 시퍼렇게 슬을 뿐

누나는 돌아오지 않고

살짝 얼다 만 연시가 녹는다

 

그리워하지 않는 사랑이 있을까

끄름이 더께더께 붙은 부엌천장에서

손금처럼 헝클어져

빈 제비집을 붙잡는 거미줄,

그 위태로운 동거로 남은 계보(系譜)에서

상여 같은 제비집은 허물어지고

뱀이 장독대 돌 틈에 벗어놓은 허물,

그 산딸기 냄새나는 텅 빈 집에서

고요(古謠)는 찬란(燦爛)한 벌을 받는다

 

벚꽃이 눈발처럼 쏟아지는 뒷산자락

배꽃이 빗발처럼 쏟아지는 앞냇가

들판 한가운데 혼자 선

돌담에서 햇살이 졸고 있는

빨간 지붕의 외딴 집,

 

오랜 시간

가슴에 맺힌 세상의 인연은

외딴 집 고즈넉한 길로 들어와

다시 되돌아가지 못한 채

감나무로 선다

한 발로 서서,

청산(靑山)으로 향하는 길을

온 몸 줄기마다 문신(文身)으로 새겨 넣으며

노랗게 주막등불 같은 감꽃을 켠다

 

 

* 39번 국도를 따라 온양에서 송악으로 가다보면 거산리에 있는 뒷산 앞내 들판 한 가운데 외딴 큰 누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