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自畵像)
자화상(自畵像)
눈이 죽음으로 향하는 모든 길을 덮은 밤, 탯줄을 끊은 바람조차 눈 위에 앉아 침묵할 뿐. 찬별만이 죽음으로 가는 길을 아는 듯 밤새 노란 봉투의 부고장을 보낸다. 집집마다 탄생의 죽음이 찾아오고, 헛간 천정 멍석으로 무겁게 매달린 침묵.....언제 끊어져 떨어질지 모르는 전전반측[輾轉反側]의 생애, 그 뒤척임조차 사치스런, 눈 내린 밤.
아버지는 부고장을 집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싸리 꽃처럼 환한 누나의 죽음을 닮은 눈꽃은 밤새 사립문을 흔들었다. 슬픔은 처마 밑 고드름으로 위태롭게 날 세워 달을 깎았다. 아버지는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대나무 숲, 그 서걱임이었다.
어머니는 부고장이 날아들면 맨발로 나갔다. 길마저 끊어진 마을 저편의 소식은 머리 풀어 헤친 풍문처럼 흉흉했다. 저민 가슴은 성에꽃으로 피어나 길가에서 슬프게 빛났다. 어머니는 문풍지 우는 소리에도 놀라는 찬 달, 그 서성거림이었다.
나는 눈 내린 밤풍경의 서늘한 전령. 길에서 얼어 죽은 막다른 골목의 얼굴, 고양이 낯빛으로 변한 하늘의 표정, 화톳불에서 태어난 환영(幻影)의 슬픈 눈, 유리창에서 사라진 그리운 꿈결, 저녁 무렵의 쓸쓸한 뒤태, 뒤란에서 서성거리며 솟는 풀소리의 느린 음보, 기차역 대합실의 서성거리는 발자국 소리, 모로 돌아누운 뒷산의 울음, 차표 잃은 노을의 당황하는 얼굴빛, 세상 모든 마을 첫 우물의 찬 유혹, 그 모든 것들의 죽음을 전하는......
바람이 모든 길에 얼어붙은 밤, 동백꽃이 세상의 모든 길을 엮어 연서(戀書)의 우표로 피어나려 애쓰는 죄, 지상의 주소 없이 떠도는 침묵의 슬픈 눈, 슬프도록 아름다운 숨소리를 내려 전전 긍긍(戰戰兢兢)하는 매혹적인 비애가 아프도록 그립다.
얼마나 더 행려병을 앓아야, 얼마나 더 교교하고 쓸쓸하고 외로워져야 부고장을 들고 떠나는 묵죽(墨竹)의 발자국으로 남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