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지
저수지
가만히 누운 몸에서 누룩 냄새가 나고 솔 향으로 질펀하게 불은 송편냄새가 코끝을 홀쳐맨다. 버드나무 한 그루 배꼽처럼 터 올라 소란(騷亂)의 탯줄을 잘라 매듭짓고 있다. 그 모양이 꼭 담뱃가루 묻은 왕 눈깔사탕을 꺼내던 외할머니 스웨터 주머니처럼 기운 자국 선연하다. 밥 짓는 저녁 청솔 타는 연기가 낮게 가라앉아 매캐한 눈으로 침잠(沈潛)하는 사위의 눈동자처럼 슬프다.
한 번 그 몸을 뒤척이니 마른 여물 써는 소리가 들리고 쇠죽 끓는 소리에 누렁소가 투레질하는 소리가 난다. 바람 한 번 휘감고 둘레를 도니 느린 장단에 맞춘 타령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풍경소리처럼 낭랑하진 않아도 낮은 곳으로 더디고 느리게 울려 퍼지는 침묵의 종소리다. 참 무겁게 젖었다.
돌멩이 하나 집어 물수제비를 뜨면 그 건너뛰는 발돋움 자리마다 푸른 멍이 들어 파란 제비꽃이 피고, 침묵으로 굳은 두부 같은 저녁이 찾아온다. 그런 저녁이면 잎 넓은 고요가 수면에 떠오르고, 잎 뾰족한 벚나무가 가지를 뻗었다가 두려워 웅크린 채 꽃봉오리를 맺는다. 침묵은 수면처럼 잔잔하지만 깊은 연민을 지닌 것, 가지를 뻗었으면 하얀 벚꽃으로 피든가 붉은 단풍이라도 물들어야지.. 둥지를 부수고 떠났으면 붉은 심장하나는 건져야지.. 짐 싸서 집 떠났으면 시 한편 같은 삶은 살아야지 수면이 일렁인다.
사랑하며 사는 일이 어찌 쉬우랴 누운 채로 산을 비추고 갸날프게 떨어져 내리는 산의 비듬을 받아내는 일, 새벽 논두렁을 밟는 발자국 소리를 수북하게 쌓는 일, 한 낮의 매미 울음소리를 켜켜이 채집하는 일, 밤새 달빛이 아궁이를 지펴 침묵을 지키는 일, 다 사랑이지만 수백의 산줄기를 동여매고 엮으며 걸은 걸음만이 그 산의 깊이를 알 수 있는 법, 섞이지 않는 산줄기가 어디 있으며 섞이지 않는 슬픔의 줄기가 어디 있으랴 평소 섞이지 않던 외로움조차 서로 몸 섞으며 넘어지더라도 받아주는, 그 깊은 속만큼 애닯은 사랑이 있을까, 가슴은 구멍 뚫린 담배 잎 같아서 바람이 자주 울고 지나갔어도 그 아물며 아문 파문을 잔잔하게 주름지어 기우는 사랑이 또 있을까 산의 검은 그림자를 덥썩 안고 품에 들여 뒤척이는 밤을 새우는 일이 하루 이틀이었을까 산의 뒷모습을 자주 훔쳐와 신열로 펄펄 끓는 몸살을 앓는 사랑이 그렇게도 서툰 사랑이었을까
당신을 사랑해서 해가 지도록 아프고 외로운 저녁, 있는 힘 다해 어깨위로 산을 들어 올렸더니 소나무 숲에 달이 휘영청 붉게 빛난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마음에 나뭇잎 하나 떨어져도 파문이 일고 바람 잔잔하게 수그러든 소나무 가지마다 솔방울 같은 그리움이 매달린다. 그 숲 사이에서 꼭 무릎 꿇고 일어서는 소 한 마리 물마중하는 물꼬를 트고, 가장 오랫동안 그 걸음소리를 듣다보면 가장 오래된 종소리에 잠깬 가장 먼별이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