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의 편지 - 삶의 신화창조
사랑하는 하람이 보거라 -“거듭 태어남, 존재에 대한 예의” |
1. 인간은 거듭 태어나는 존재 : “인생의 신화창조를 위한 고난과 고독의 선택”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은 '거듭 태어나는 존재들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곰은 자신의 존재전이를 꿈꾸었습니다. 자신의 존재가 곰에서 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고통만이 존재하는 동굴 속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그 동굴은 가장 힘든 상황적 조건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제 형상조차 볼 수 없는 어둠이 있었고, 등짝에 달라붙은 배고픔이 있었으며, 살을 에이고 뼈 속까지 파고드는 추위가 있었습니다. 어둠과 동굴의 결합은 그 속을 찾는 곰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곰은 자신의 존재변화를 위해 어려운 상황적 조건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결단을 감행하였습니다. 곰은 인간으로 탄생하기 위하여 배고픔과 추위, 불편함과 공포가 존재하는 생활의 조건을 스스로 선택하였습니다. 곰은 존재변화의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힘든 상황을 선택하였습니다. 곰은 변화가능성에 대한 기대만을 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미래의 희망에 대한 긍정적인 해답만이 곰을 지켜줄 수 있었습니다. 곰이 딛고 설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신의 미래가 변화할 것이라는 믿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곰에게 동굴 속의 생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둠의 동굴 속에서 100일 이라는 시간'은 곰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동굴 속의 시간은 자기를 미워하면서도 그 미움조차도 감싸 안아야 하는 자기연민과 자기부정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굴 속의 100일>은 곰에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는 <탄생의 공간이자 기회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동굴 속의 생활을 견디면서 곰은 쉬고 싶고, 배부르게 먹고 싶고, 잠자고 싶은 자신의 본능과 싸워야 했습니다. 또 본능의 결핍이 가져오는 한계 상황에 다다를수록 지레짐작 '자포자기'하려는 마음과 싸워야 했습니다. 이미 포기하고 떠나려는 호랑이를 뒤쫓아 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을 때는 치열한 전투병처럼 자신과 싸웠습니다. 본능의 결핍, 자포자기의 마음, 도망치고 싶은 충동 중에서 가장 힘든 일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 이겨내는 일이었습니다. 곰 자신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존재변화의 불확실성, 그로인한 불안정한 정서', 그리고 어려운 과정의 견딤이 '과연 좋은 결과를 보장할 수 있는가'하는 '실패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운 마음'과 싸워야 했습니다. 마음에 '조그만 방심'과 '허튼 마음의 틈'이 생기면 '과연 자신이 선택한 길이 잘못 선택한 길은 아닐까'하는 존재의 불안과 직면하였습니다. 그 때마다 곰은 외로운 결단을 해야 했으며, 사막을 혼자 걸어 가야 하는 막막함에 괴로웠습니다. 소리라도 마음껏 지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울부짖어도 소리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울부짖는 소리를 낼 수 있어도 그 울부짖는 소리는 혼자 들어야 했습니다. 아무리 울부짖어도 소리조차 나지 않았고, 어쩌다 울부짖어도 그 울부짖는 소리는 자신밖에 들을 수 없는 메아리로 되돌아 왔습니다. 되돌아오는 울림을 안고 견디는 실존은 차라리 무서움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들어줄 리 없는 울부짖음이 다시 자신 속으로 파고들 때마다 그는 '삶의 견고한 고독"에 마음이 외로웠습니다. 곰에게 쑥 한줌과 마늘 스무 쪽이라는 외부조건의 열악함은 그래도 견딜만 했습니다. 차가운 동굴은 그래도 차가운 지성을 훈련할 수도 있었습니다. 어둠의 장막은 그래도 또렷한 의식을 잉태하기도 하였습니다. 배고픔, 추위, 그리고 어둠은 그래도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용기를 허락하였습니다. 하지만 곰의 마음은 무척 흔들렸습니다. 그 불리한 상황을 탓하면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염려와 불안 "은 너무 버거웠습니다. 그러나 곰은 단 한 가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저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변화에 대한 열정과 정성>밖에 없었습니다. 힘들어하면서도 온 정성을 다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차라리 사랑하였습니다. 힘들어하면서 못나고 일그러진, 그래서 아주 나약한 모습도 자신의 일부분으로 여기고 껴안았습니다. 곰은 자신의 <나약함을 껴안으면서 미래에 대한 정성을 기울이는 일>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곰은 어려움을 단순히 참아낸 '인내의 화신'으로만 그려질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곰은 <자기 변화의 시기>를 적극적으로 선택하여 "거듭 태어남"의 노력을 기울이는 운명의 개척자였습니다. 주어진 운명의 화살을 맞고 쓰러져 <어쩔 수없이 살았던 존재>가 아니라 <자기 삶을 선택하여 책임을 지는 실존의 개척자>였습니다. 곰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스스로 염려하고 결단하는 자유와 책임을 지닌 존재였습니다. 선택의 과정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느꼈지만, 자기의 기획과 의도를 스스로 구상하여 설계를 하고, 실천해 내는 <행동하는 자유인>이었습니다. 곰은 "노력의 지속성과 정성의 온전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구체적으로 실천하였습니다. 곰은 "자기 변화의 정성과 노력"을 거친 후에야 자신 속에 웅크리고 있던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곰은 <100일이라는 신화탄생의 시간과 공간>을 스스로 찾아 들어 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곰은 자신의 가능성을 입체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었습니다. 만약 곰에게 고통과 불편함을 견뎌냈던 <신화 탄생의 기회>가 없었다면, 그는 '하고 싶은 소망'을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전환시키고, '가능성'을 '현실'로 증명하는 일은 일어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운명을 개척하는 동굴의 어둠이 있었으므로 곰은 <자기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곰이 인간으로 거듭 태어난 이후로 인간은 끊임없는 <자기 변화와 거듭 태어남>을 도전해오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에게 그 도전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이제 거듭 태어나야 할 당사자들이 되었습니다. 제2의 탄생은 이제 바로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내야 할 <눈앞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 현실은 내 삶을 가로막는 장애물도 아니고, 도망치고 싶은 현실도 아닙니다. 다만 자기 운명을 개척할 기회와 계기로서 찾아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기 변화를 시도했던 신화의 공간과 시간"을 스스로 선택하는 일만이 남았습니다. <자기 변화가 가능한 신화의 창조>, <삶의 응축된 집적물들의 질적인 변화>, 결국 우리는 <삶의 비약>이 가능한 다리 앞에 서 있습니다. 그 다리는 우리가 건너야 할 다리입니다. 비껴 갈 수도 없고 돌아갈 수도 없는 삶의 유일한 다리입니다. 천천히 한 걸음을 옮겨 놓아야 합니다. 다리를 건너기 위한 첫 한걸음으로 우리 삶은 변화할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삶의 어느 한 시기를 <자기를 거듭 태어나게 하는 신화의 공간과 시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바로 지금의 <이 상황과 이 상태에서 주저앉아 울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내 인생을 알고 있으며, 지금까지 고민한 삶의 날들이 너무 아깝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사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습니다. 분명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은 우리에게 외로움과 불편함을 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거듭 태어남"의 계기가 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꿈과 가능성, 정직한 소망"을 줄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거듭 태어남>의 변화를 추구하면서 자신에게 예외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것은 "희망 있는 패배"와 "가능성 있는 좌절"일 것입니다. |
하람아!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어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Die Eule der minerva beginnt erst mit der einbrechenden Dammerung ihren Flug)”는 헤겔의 말처럼, 모든 일은 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단다. 욕심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걱정과 불안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단다. 모든 일은 그만큼의 댓가를 지불해야 하며, 그 만큼의 정성과 열정을 보태야 하며, 그 만큼의 시간을 보내야 이루어진단다. 모든 일에 서두르지 말고, 두려워말고, 자만하지 말고, 우직하게 뭍소의 뿔처럼 너 혼자서 우직하게 가야 한단다. 지금 너는 스스로 외롭고 힘든 시간을 선택하여 그 시간을 들이고 정성을 들이고 노력하고 있단다. 때가 되면 네가 겪은 모든 경험은 삶의 자산이 된단다. 네가 겪은 슬픔, 아픔, 외로움 모두가 네 인생을 안내하는 인도자 역할을 할 거란다. 네가 직접 겪은 삶의 체험이 너를 가르치는 최고의 교사란다. 네가 겪는 경험은 다 이유가 있는 거란다. 다 까닭이 있고, 다 목적이 있단다. 지금 현실에서 겪는 고난은 가까이서 보면 아픔이고 슬픔이고 외로움이지만, 먼 시간에서 보면 아름다운 추억이란다. 인생은 직접 겪으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과도 같단다.
하람아! 사람은 더 좋은 것을 추구하는 삶을 최선의 삶으로 여긴단다. 플라톤이 이야기한 선(좋음, 善)의 idea가 최고의 이데아이듯, 더 좋은 것을 추구하는 삶이 아름답단다. 어제 보다 더 나은 오늘을 추구하고,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추구하는 삶의 태도가 중요하단다. 그 사람의 태도나 경향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가 보인단다. 노력하고 정성을 다하는 삶의 태도를 지니면 이 세상을 모든 것을 동원하여 응원하고 도움을 준단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와주며, 스스로 자기 삶을 만들며 더 나은 것을 실천하는 사람을 응원하여 그 길을 열어준단다. 좋은 것을 선택하여 실천하는 것이 용기이며, 좋은 것을 어려운 조건에서 선택하여 이루는 것이 정성이란다.
하람아! 사람은 두 번의 탄생을 거친단다. 육체의 탄생을 제1의 탄생이라 한다면, 정신의 깨달음을 얻고 자기 길을 만들어 가는 독립적 자세와 태도를 지니는 것은 제2의 탄생이란다. 알의 껍질로 보호를 받던 새가 그 껍질을 깨고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는 새로 변화하고, 나뭇잎을 갉아먹고 만족하는 애벌레에서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나비로 변하는 고통의 과정을 겪고, 물고기의 머리만을 쫓아다니는 갈매기에서 하늘을 높이 날아 가장 멀리 볼 수 있는 갈매기로 변하는 과정을 거치듯, 사람도 누구나 자기 변화와 모색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탄생을 한단다. 곰에서 인간으로 탄생하는 신화창조의 과정을 거치듯, 하람이 너도 네 인생의 신화창조를 위한 변화의 과정을 겪고 있단다. 네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외로운 시간과 불편한 상황을 선택하여 그 길을 가면서 더 나은 삶을 만들고 있단다. 네가 겪는 고난과 외로움은 네 삶의 발전을 위한 기회로 변한단다. 힘 내거라.
2. 존재에 대한 예의
나침반은 북극점을 가리키며 바늘 끝을 가늘게 떨고 있을 때 자기의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만일 나침반의 바늘 끝이 흔들리지 않고 정지해 있다면 고장 난 장난감일 뿐 자기의 사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나침반은 방향을 가리키는 일을 삶의 업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침반은 늘 파르르 떨고 있는 얼굴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깃발은 사람들의 소망을 담아 흔들리고 있을 때 자기의 존재를 이 세상에 세우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람이 세차게 불어도 깃발이 사람들의 소망을 담아내어 흔들리지 못한다면 헝겊의 나풀거림일 뿐 자기의 존재 기반을 상실한 것입니다. 깃발은 가슴 벅찬 소망으로 존재의 밑바닥에서 솟구쳐 오르는 함성으로 흔들리는 것을 삶의 업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깃발은 온 몸을 흔드는 몸짓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에게 향을 발라줌으로써 삶의 가치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만일 향나무가 나무를 찍는 도끼자루가 된다면 그것은 부지깽이로도 쓸 수 없는 삭정이 일뿐 용서를 가르치는 향나무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향나무는 상처의 아픔으로 엮은 용서를 가지고 죽은 영혼을 달래는 향불로 거듭 태어날 자격을 지니는 것입니다. 파도는 긴 호흡으로 들이마시고 한 숨에 몰아 토해내는 충격으로 태어남으로써 존재의 근원을 찾아 떠날 줄 압니다. 파도는 먼저 바닷가의 돌들을 반듯하게 고르는 일로 존재의 근원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낮은 곳을 찾아 흘러 흘러 들어드는 일로 삶의 맥을 세워 나가는 것입니다. 만일 파도가 존재의 근원을 찾아 아래로 떠날 수 있는 파장이 되지 못한다면 파도는 그저 물거품일 뿐 거센 에너지가 되고 힘줄 튀어 오르는 변화의 근원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파도는 충격과 파장으로 돌에 온 몸을 부딪치는 모험으로 살아가기를 좋아합니다. 개구리는 논둑에서 밤새워 울 때 사랑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두 눈이 튀어나오도록 목젖에 피가 나도록 울부짖을 때 사랑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개구리가 울지 않는다면 봄이 오더라도 가슴 저린 사랑을 얻을 수 없습니다. 개구리는 울음으로 존재의 업보를 달래고 있습니다. 새는 물고기를 잡아먹는 일에 만족하지 않고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가고자 할 때 새가 될 수 있습니다. 날기를 그치고 언덕에 앉거나 배부름에 취해 졸고 있을 때 새는 날개를 잃은 닭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애벌레는 나뭇잎을 갉아먹고 편안히 잠자는 일에 만족하지 않고 나비가 되고자 하는 소망을 지닐 때 나비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소망은 애벌레이기를 포기할 만큼 간절해야 합니다. 사람은 떨림, 흔들림, 되갚음, 흐름으로 살아있음을 증거 합니다. 떨림은 사명을 완수하려는 몸짓이며 흔들림은 소망을 이루려는 치열함이며 되갚음은 좋은 일을 이루다가 얻는 마음의 상처를 달랠 수 있는 치료약이며 흐름은 존재의 시작을 지속해 나가는 처절함입니다. 분명히 삶에는 세속적인 성공보다 더 중요한 삶의 가치가 존재합니다. 사람이 살 수 있는 모습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다만 그 모습 속에 거스를 수 없는 자연법칙이 존재하는 모양만은 닮았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살 수 있는 영역과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이 우주를 모두 살아갈 수 없으며 영원한 시간을 통해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사람에게 허락된 유일한 것은 자신이 살 수 있는 영역에서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여 사는 일이며 자신이 살 수 있는 시간에서 가치 있는 것에 정성을 들이는 양을 많이 확보하여 사는 일 일 뿐입니다. 존재함에는 최소한의 예의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한정된 시간과 영역을 살다보면 돈의 많고 적음에 현혹되기 쉽고 지위의 높고 낮음에 유혹되기 쉽고 명예의 넓고 좁음에 흐트러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런 세속적인 성공과는 분명 차이가 나는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삶"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존재함에는 편안, 편리, 빠름보다 더 가치 있는 원칙이 필요합니다. 어떤 모양의 세상살이라도 그저 살 수 없으며 쉽고 편안하고 빠르게 이루어질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원칙이 적용됩니다. 더욱이 "가치 있는 삶"은 어렵고 불편하고 시간이 오래 걸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구불구불한 나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나무는 자기가 태어난 환경과 딛고 서있는 땅과 처한 위치에서 스스로 성장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자랍니다.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가지가 굽을 뿐 결코 꺾이는 법이 없습니다. 길게 누워 뻗은 좁은 그림자를 만들기도 하지만 더 넓은 그늘로 사람살이의 쉼터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구불구불 성장하지만 그 안에 수많은 생명을 품고 가꾸는 가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
하람아! 배는 항구에 정박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바다를 항해하려고 태어났단다. 사람도 거센 역경 속에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기 위해 태어났단다. 살면서 겪는 고난은 더 나은 가치를 자신의 삶에서 만들려는 불가피한 선택이란다. 처음부터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는 길은 없단다. 길은 그 누군가가 가시 덩쿨에 찔리며 지나갔고, 또 누군가가 그 곳을 뒤따라 걷고 걸어 만들어진 것이란다. 처음부터 만들어진 원래 길은 없단다. 그 길을 처음으로 걸으면서 자기 길을 만드는 것이란다. 자갈 깔린 황무지를 누군가 처음으로 걸었고, 그 길을 여러 사람들이 뒤따라 걸으면서 길을 만들었단다. 하람이 네가 가는 길도 알고 보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걷는 길이란다.
하람아! 바다를 미치도록 그리워하는 자만이 바다를 항해할 수 있단다. 바다에 대한 강렬한 동경과 낭만적 그리움만이 불리하고 험한 역경을 이겨 바다에 도착하도록 만들고, 배가 없으면 배를 만들어 거센 파도를 이용해 항해한단다. 고기로 가득채운 만선의 꿈을 안고 바다를 항해한단다. 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하더라도 항해하는 과정의 준비는 설레는 법이란다. 바다를 미치도록 그리워하는 자는 신발이 없으면 맨발로라도 가는 법이며, 사랑하는 사람이 붙들어도 가는 법이란다. 네 가슴에서 나오는 열정으로 세상의 모순을 이겨내고 네 가슴의 뜻과 의지로 한계로 보이는 장애물을 뛰어 넘어야 한단다. 내 앞에 있는 문을 열지 않으면 하나의 벽일 뿐이란다. 문을 열면 찬바람 몰아쳐도 그 문을 열고 한계 너머의 세상으로 향해야 한단다.
하람아! 네가 겪는 외로움, 슬픔, 아픔도 네 삶의 일부란다. 양말을 겉에서 보면 깔끔하지만 속을 뒤집어 보면 꿰맨 흔적이란다. 사람 삶도 겉으로는 무난해 보여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상처투성이고 실수투성이고, 시행착오의 연속이란다. 네가 겪는 아픔까지도 꼭 껴안고 사랑하거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와주지만, 사람은 스스로 자기 삶을 사랑하는 자를 좋아한단다.
3. 유안진의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벗 사이의 맑고도 고귀한 사귐)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살았으면 좋겠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열어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을까.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그가 여성이라도 좋고 남성이라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은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그는 반드시 잘 생길 필요가 없고, 수수하나 멋을 알고 중후한 몸가짐을 할 수 있으면 된다. 때로 약간의 변덕과 신경질을 부려도 그것이 애교로 통할 수 있을 정도면 괜찮고, 나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하게 맞장구쳐 주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흘러 내가 평온해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지는 않다. 많은 사람과 사귀기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길 바란다. 나는 여러 나라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끼니와 잠을 아껴 될수록 많은 것을 구경하였다. 그럼에도 지금은 그 많은 구경 중에 기막힌 감회로 남은 것은 없다. 만약 내가 한두 곳 한두 가지만 제대로 감상했더라면, 두고두고 자산이 되었을걸..... 우정이라 하면 사람들은 관포지교를 말한다. 그러나 나는 친구를 괴롭히고 싶지 않듯이 나 또한 끝없는 인내로 베풀기만 할 재간이 없다. 나는 도 닦으며 살기를 바라지는 않고, 내 친구도 성현같아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나는 될수록 정직하게 살고 싶고, 내 친구도 재미나 위안을 위해서 그저 제 자리서 탄로 나는 약간의 거짓말을 하는 재치와 위트를 가졌으면 싶을 뿐이다. 나는 때때로 맛있는 것을 내가 더 먹고 싶을 테고, 내가 더 예뻐 보이기를 바라겠지만, 금방 그 마음을 지울 줄도 알 것이다. 때로 나는 얼음 풀리는 냇물이나 가을 갈대숲 기러기 울음을 친구보다 더 좋아할 수 있겠으나, 결국은 우정을 제일로 여길 것이다. 우리는 흰 눈 속 참대 같은 기상을 지녔으나 들꽃처럼 나약할 수 있고, 아첨 같은 양보는 싫어하지만 이따금 밑지며 사는 아량도 갖기를 바란다. 우리는 명성과 권세, 재력을 중시하지도 부러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 보다는 자기답게 사는데 더 매력을 느끼려 애쓸 것이다. 우리가 항상 지혜롭진 못하더라도, 자기의 곤란을 벗어나기 위해 비록 진실일지라도 타인을 팔진 않을 것이다. 오해를 받더라도 묵묵할 수 있는 어리석음과 배짱을 지니기를 바란다. 우리의 외모가 아름답지 않다 해도 우리의 향기만은 아름답게 지니리라. 우리는 시기하는 마음 없이 남의 성공을 얘기하며, 경쟁하지 않고 자기하고 싶은 일을 하되, 미친 듯이 몰두하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정과 애정을 소중히 여기되 목숨을 거는 만용은 피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우정은 애정과도 같으며, 우리의 애정 또한 우정과도 같아서 요란한 빛깔과 시끄러운 소리도 피할 것이다. 나는 반닫이를 닦다가 그를 생각할 것이며, 화초에 물을 주다가, 안개 낀 아침 창문을 열다가, 가을 하늘의 흰 구름을 바라보다 까닭 없이 현기증을 느끼다가 문득 그가 보고 싶어지며, 그도 그럴 때 나를 찾을 것이다. 그는 때로 울고 싶어지기도 하겠고, 내게도 울 수 있는 눈물과 추억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다시 젊어질 수 있는 추억이 있으나, 늙은 일에 초조하지 않을 웃음도 만들어낼 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헤프지 않게, 가지는 멋보다 풍기는 멋은 사랑하며. 냉면을 먹을 때는 농부처럼 먹을 줄 알며, 스테이크를 자를 때는 여왕보다 품위 있게, 군밤을 아이처럼 까먹고, 차를 마실 때는 백작부인보다 우아해지리라. 우리는 푼돈을 벌기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이며, 천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는 오동나무처럼,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자유로운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살고자 애쓰며 서로 격려하리라. 우리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특별히 한두 사람을 사랑한다 하여 많은 사람을 싫어하진 않으리라. 우리가 멋진 글을 못 쓰더라도 쓰는 일을 택한 것에 후회하지 않듯이, 남의 약점도 안쓰럽게 여기리라. 내가 길을 가다가 한 묶음 꽃을 사서 그에게 안겨줘도, 그는 날 주착이라고 나무라지 않으며, 건널목이 아닌 데로 찻길을 건너도 나의 교양을 비웃지 않을게다. 나 또한 더러 그의 눈에 눈곱이 끼더라도, 이 사이에 고춧가루가 끼었다 해도 그의 숙녀 됨이나 그의 신사다움을 의심치 않으며, 오히려 인간적인 유유함을 느끼게 될 게다. 우리의 손이 비록 작고 여리나 서로를 버티어 주는 기둥이 될 것이며, 우리의 눈에 핏발이 서더라도 총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며, 눈빛이 흐리고 시력이 어두워질수록 서로를 살펴주는 불빛이 되어 주리라. 그러다가 어느 날이 홀연히 오더라도 축복처럼, 웨딩드레스처럼 수의를 입게 되리라. 같은 날 또는 다른 날이라도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이 돋아 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
하람아! 사람은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자아실현’과 사랑하면서 사는 인간관계의 형성‘이라는 범주에서 살아간단다.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듣고 그 길을 가면서 함께 걷는 동행의 인간관계를 형성한단다.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자는 눈앞의 편안과 당장의 이익에 현혹되지 말고 긴 안목으로 바라보면서 불편과 손해를 스스로 선택하기도 한단다. 자기 둥지를 부수고 사냥을 떠나는 장산곶매처럼, 결연한 새벽의 발걸음으로 힘든 길을 선택하여 가는 거란다. 가다가 길을 잃으면 주저앉아 쉴 일이 아니라 가장 높은 봉우리를 찾아 올라가야 하며 그 봉우리에서 전체의 지형과 갈 길을 바라보아야 한단다. 주저앉은 곳에 서 보이는 것들은 그늘과 나무 한그루이지만 산봉우리에 오르면 산맥이 보이고, 형세가 보여 더 멀리 보이고 더 넓게 볼 수 있단다. 함께 가는 사람과 행복하려면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단다. 사랑함이 사랑받음보다 행복하단다. 미워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고통이란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고통이란다. 사랑하면서 함께 삶의 길을 묵묵히 가는 거란다. 함께 가는 사람이 우산이 없으면 내 우산을 씌워주는 것보다 함께 비를 맞으면서 처지를 겪고 뜻을 나누는 것이 더 현명하단다. 추운 날 장갑을 끼울 수 없는 사람이라면 내 장갑을 벗고 함께 언 손을 잡으며 온기를 전하는 거란다.
하람아! 사막을 횡단한 자가 횡단의 기념비를 세우는 모습보다는 그 사막을 횡단하는 그 누군가를 위해 우물을 파두는 모습이 더 아름답단다. 기념비는 비바람에 깎여 사라지지만 우물은 그 누군가의 생명수로 자리 잡는단다. 네가 가는 길, 산을 넘고 사막을 건너는 일처럼 끊이지 않고 가야할 길이란다. 가다 힘들면 아빠에게 힘들다 소리치거라. 가다 넘어지면 넘어진 그곳을 짚고 일어나 다시가거라. 넘어져서 정 못 가겠거든 도와 달라 아빠에게 소리치거라. 소리치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아빠를 보거라. 네 눈빛을 보고 아빠가 달려간단다. 네가 멀리 있어 못갈 상황이면 아빠는 마음을 다해 기도하고 정성을 다해 네가 일어날 거라 믿을 거란다.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처럼 아빠는 네 친구로서 네 삶과 함께 할 거란다. 힘 내거라. 사랑한단다.
2013.09.12 힘든 상황을 항상 함께 겪으면서 사는 친구인 아빠가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