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사랑이 익어가다
쉰, 사랑이 익어가다
1. 안도현의 시 <스며드는 것>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는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 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2. 서정주의 <입맞춤>
가시내두 가시내두 가시내두 가시내두
콩밭 속으로만 자꾸 달아나고
울타리는 마구 자빠뜨려 놓고
오라고 오라고 오라고만 그러면
사랑 사랑의 석류꽃 낭기낭기
하늬바람이랑 별이 모두 우습네요
풋풋한 산노루떼 언덕마다 한 마리씩
개구리는 개구리와 머구리는 머구리와
굽은 강물은 서천으로 흘러 내려……
땅에 긴 긴 입맞춤은 오오 몸서리친
쑥잎을 지근지근 이빨이 허허옇게
짐승스런 웃음은 달더라 달더라
울음같이 달더라.
3. 그리운 악마...이수익
숨겨둔 정부情婦 하나
있으면 좋겠다.
몰래 나 홀로 찾아 드는
외진 골목길 끝, 그 집
불 밝은 창문窓門
그리고 우리 둘 사이
숨막히는 암호暗號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
아무도 눈치 못 챌
비밀 사랑,
둘만이 나눠 마시는 죄罪의 달디단
축배祝杯 끝에
싱그러운 젊은 심장의 피가 뛴다면!
찾아가는 발길의 고통스런 기쁨이
만나면 곧 헤어져야 할 아픔으로
끝내 우리 침묵해야 할지라도,
숨겨둔 정부 하나
있으면 좋겠다.
머언 기다림이 하루종일 전류처럼 흘러
끝없이 나를 충전 시키는 여자,그 악마 같은 여자.
4. 서정주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하지는 말고
좀 섭섭한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5. 강연호의 <적멸(寂滅)>
지친 불빛이
저녁을 끌고온다.
찬물에 말아넘긴 끼니처럼
채 읽지못한 생각들은 허기지다.
그대 이 다음에는 가볍게 만나야지.
한때는
수천번이었을 다짐이
문득,헐거워질때 홀로 켜지는 불빛
그어떤 그리움도
시선이 닿는 곳까지만
눈부시게 그리운 법이다.
그러므로
제몫의 세월을 건너가는
느려터진 발걸음을 재촉 하지말자.
저 불빛에 붐비는 하루살이들의 생애가
새삼스럽게 하루뿐이라 하더라도
이밤을 건너가면
다시
그대 눈밑의 그늘이
바로 벼랑이라 하더라도
간절함을 포기하면 세상은 조용해진다.
달리 말하자면
이제는 노래나 시(詩)같은것.
그 동안 베껴썼던 모든 문자들에게
나는 용서를 구해야한다.
혹은,
그대의 텅빈 부재를 채우던
비애(悲哀) 마저
사치스러워 더불어 버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