啐啄同時-나의 교육

그 곳 온수동에서 그 때 가을에-소유함과 존재함에 대하여

nongbu84 2014. 11. 7. 08:54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사회는 전적으로 소유 지향과 이윤 추구로 처방된 사회이다. 따라서 존재적 실존 양식의 실례는 찾아보기 힘들고, 대다수 사람들은 소유를 겨냥하는 실존을 당연한 것으로, 그야말로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 방식으로 여긴다. 이 모든 현상은 특히, 존재라는 실존 양식의 특성을 이해하고 결국 가능한 유일한 인간의 성향이 소유라는 사실마저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 개념은 인간의 경험에 근거한다. 두 개념 가운데 그 어느 쪽도 순전히 추상적으로, 이성적 방식으로만 고찰되어서는 안 되며, 또 그럴 수도 없다. 두 개념은 모두 우리의 일상생활에 반영되는 것으로, 따라서 구체적으로 취급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에 서술한 일상생활에서 나온 단순한 실례들은 소유와 존재의 선택적 양식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도와주리라고 생각한다.

 

<독서>

대화에 해당되는 요체는 작가와 독자 사이의 대화라고 할 수 있는, 마땅히 그래야할 독서의 경우에도 십분 해당된다. 물론 독서를 할 때는(대화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무엇을' 읽는가(또는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술성 없이 싸구려로 만들어진 소설을 읽는 과정은 백일몽과 같은 형태이다. 그런 독서는 생산적 반응을 허용하지 않는다. 텍스트는 시시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듯, 또는 화면을 보면서 씹어 먹는 감자 칩처럼 무심코 삼켜질 뿐이다. 그와는 달리, 예컨대 발자크의 소설 같은 것은 진심으로 관여하는 생산적 독서, 다시 말하면 존재 양식으로서의 독서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책들도 십중팔구는 소비 행위 - 즉 소유 양식으로 - 읽힌다. 독자는 호기심에 이끌려서 줄거리를 알고 싶어 한다. 주인공이 사아 남는지 죽는지, 여주인공이 유혹에 빠지는지 아닌지를 궁금해 한다. 이런 경우 소설 텍스트는 독자를 흥분시키는 일종의 전희 역할(前戱役割)을 하며, 행복하든 불행하든 그 결말이 절정을 이룬다. 결말을 알고 났을 때 독자는 마치 자기 자신의 기억들을 헤집어 본 듯이 현실감 있게 이야기 전체를 소유한다. 그러나 그가 획득한 인식은 아무것도 없다. 소설 주인공을 파악하여 인간의 본성을 통찰하는 능력도 심화시키지 못했고, 스스로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깨우친 바도 없다.

 

철학서나 역사서를 읽을 때도 이런 차이는 드러난다. 철학서나 역사서를 대하는 올바른 독서 태도 - 또는 나쁜 독서 태도 - 는 교육의 결과이다. 학교는 모든 학생에게 일정한 양()'문화적 자산'을 전달하려고 애쓰고 있고, 수업 기간이 끝나면 각 학생에게 그 중 최소한의 것은 습득했음(소유했음)을 입증하는 졸업장을 준다. 따라서 학생은 책을 읽을 때 저자의 주요 사상을 뒤따라서 암기하는 식을 주입받는다. 이런 방식으로 학생들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 그리고 하이데거와 사르트르까지를 알게 된다. 고등학교에서 대학교에 이르는 교육 수준의 차이는 주로 전수받은 교양적 자산의 양적(量的) 측면에서 드러나며, 전수받은 교양적 자산은 어쩌면 학생들이 훗날 생애에서 관장할 물질적 자산의 양과 비례할 수도 있다. 우수하다고 인정받는 학생은 과거 철인들이 말한 경구를 가장 정확하게 따라 외울 수 있는 학생들이다. 그는 해박한 박물관 안내인과 비견된다. 지식의 소장품 외곽의 것은 습득하지 못한다. 선대 철인들을 문제의 과녁에 놓고 그들을 대상으로 대화를 펼치기를, 그들도 자기모순을 지니고 있으며 어떤 문제들은 제쳐 놓고 어떤 주제들은 회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기를 배우지 못한다. 언제 작가가 순순히 머리로만 이야기하는지, 언제 마음과 머리를 다해서 말하는지를 느끼지 못하며, 작가가 진실된 인물인지 허풍선인지 - 그 밖의 여러 가지를 깨닫지 못한다.

 

이와는 달리 존재 양식으로 책을 대하는 독자는 아무리 저명한 저서라도 다소간에 무가치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확신에 이를 수 있다. 어쩌면 그는 때로는 작가 자신보다 그 책을 더 잘 이해할 수도 있다. 작가에게는 자신이 쓴 것은 모조리 중요하게 보였을 테니 말이다.

 

<사랑>

사랑의 행위 역시 소유 양식으로 말 해지는가 존재 양식으로 말해지는가에 따라서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사랑을 소유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다면 사랑은 아마도 하나의 사물, 획득하고 소유할 수 있는 어떤 실체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사랑'이라는 사물은 없다. '사랑'이란 추상적 개념으로서, 여신(女神)이라든가 어떤 이질적인 존재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껏 그것을 목격한 사람은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사랑의 행위뿐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생산적인 활동이다. 사랑이란 - 그 대상이 이간이든 나무이든 그림이든 어떤 이념이든 간에 - 누구인가(또는 무엇인가)를 배려하고 알고자 하며, 그에게 몰입하고 그 존재를 입증하며 그를 보고 즐거워하는 모든 것을 내포한다. 그것은 그(그녀 또는 그것)을 소생시키며 그(그녀 또는 그것)의 생동감을 증대시킨다. 사랑은 소생과 생장을 낳는 과정이다.

 

그러나 소유 양식으로 체험되는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구속하고 가두며 지배함을 의미한다. 이런 종류의 사랑은 생명감을 불러일으키기는커녕 목을 조여서 마비시키고 질식시켜서 죽이는 행위이다.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도 사실상 사랑의 부재를 은폐하려는 내용의 오용된 표현이기 일쑤이다.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도 전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다. 지나간 2,000년 서구 역사에서 볼 수 있는, 육체적 학대에서 정신적 학대에 이르기까지, 무관심과 순전한 소유욕에서 새디즘에 이르기까지 어린이들에게 가한 부모의 잔혹한 행위에 대한 보고들이 어찌나 충격적인지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통례라기보다는 예외라고 여겨질 지경이다.

 

결혼 생활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사랑을 바탕으로 결혼했든 전통적 방식으로 사회적 인습에 따라서 결혼했든 간에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부는 예외인 듯이 보인다. 사회적 편의, 전통, 경제적 타산, 자식에 대한 공유의 관심, 상호간의 의존, 또는 두려움이나 증오가 의식적으로 '사랑'으로 체험된다. - 마침내 그 중 한 사람이나 둘 다, 서로 사랑하고 있지 않으며 과거에도 사랑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까지는 말이다. 오늘날에는 이런 면에서 어느 부분은 진보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람들이 훨씬 현실적이고 냉철해져서, 많은 이들이 이미 사랑을 전제로 한 성적 매력을 주고받지 않으며, 친절하기는 해도 거리를 둔 공동 관계를 사랑과 맞먹는 것이라고 여긴다. 이 새로운 관점은 한결 정직한 면을 지니고 있고 - 파트너를 더 자주 바꾸는 현상을 낳는다. 그렇다고 그런 관점이 사랑하는 상대를 더 많이 만나는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이 신세대 남녀들도 아마 옛 부부만큼이나 서로를 별로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에 빠짐'으로부터 사랑을 '소유하고' 있다는 환상으로 변해 가는 과정은 사랑에 빠진 적이 있는 남녀의 역사에서 그 구체적인 예들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1956)에서 나는 '사랑에 빠짐'[falling in love]'이라는 개념 자체가 모순을 내포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사랑하고 있음은 생산적 활동 상태이므로, 사랑 안으로 들어서거나 그 안에 자리 잡을 수는 있겠지만, 그 속에 '빠질' 수는 없다. 이 동작은 수동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구애를 하는 기간에는 그 어느 편이나 상대방에 대해서 자신감이 없다. 연인들은 서로 상대방의 마음을 사려고 부심한다. 그들은 생기에 넘치고 매력적이며 관심을 돋우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 생동감은 항상 아름다운 얼굴을 만드는 법이니까. 아직은 어느 쪽도 상대방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말하자면 양측 모두 존재적 측면에, 다시 말하면 상대방에게 무엇이든 베풀고,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데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결혼과 더불어서 상황은 근본적으로 변한다. 결혼의 약속은 쌍방에게 상대방의 육체, 감정, 관심을 독점할 권리를 부여한다. 이제부터는 그 어느 편도 상대방의 마음을 사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이제 사랑은 소유하고 있는 무엇, 하나의 재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을 일깨우려는 노력도,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려는 노력도 수그러든다. 그들은 권태로워지고 각자 지녔던 아름다움도 소멸된다. 환멸을 느끼며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들은 이제 예전의 그들이 아닌 것일까? 시작부터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그들은 흔히 변해 버린 관계의 원인을 상대방에게서 찾으려고 들며 자신은 속았다는 느낌에 젖는다.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점은 두 사람 모두 서로 사랑에 빠졌던 그 때와는 이미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 사랑을 소유할 수 있으리라는 그릇된 기대감이 결국 사랑을 정지시켰다는 사실이다. 지금 그들은 그 수준에서 서로를 조율하며 서로 사랑하는 대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 이를테면 돈, 사회적 지위, 가정, 자식을 공유한다. 따라서 사랑으로 시작된 결혼도 때로는 우호적인 공동 자산체, 즉 두 개의 자기중심주의가 합자한 '가정'이라는 이름의 법인체로 변질된다. 아니면 이 법인체의 주주[부부]들은 흘러가 버린 감정이 소생하기를 갈망하면서, 다른 상대라면 자신의 열망을 채워 주리라는 망상에 자신을 맡긴다. 그러면서 자신이 바라는 것은 오로지 사랑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사랑은 한낱 우상이요 그 앞에 굴종하려는 여신일 뿐, 자신의 존재의 표현이 아니다. 그들이 사랑에 실패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모름지기 '사랑은 자유의 자식'(프랑스 옛 가요의 노랫말)이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여신을 숭배하는 사람은 그렇게 너무나 수동적인 위치로 떨어져 버려서 결국 권태로운 인간이 되고, 그나마 지니고 있던 지난날의 매력도 상실하게 된다.

 

이런 여러 가지 예를 확인했다고 해서, 결혼의 형태가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을 위한 최선의 길이라는 사실이 배제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결혼이라는 형태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배우자의 소유 지향적 성격 구조에,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 구조에 있다. 그룹 결혼, 파트너 교환, 그룹 섹스 등 현대적 형태의 공동생활 제창자들은 내가 보는 한, 한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보다는 파트너의 숫자를 늘려서 끊임없는 새로운 자극으로 권태를 물리침으로써 사랑의 난점을 기피하려는 사람들이다.

 

에리히 프롬의 [일상적 경험에서의 소유와 존재] 중에서 발췌

  

 

나는 나다.

세상 어느 곳에도 나와 똑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부분이 나와 비슷한 사람은 있겠으나

나와 완전히 똑같은 사람은 없다.

나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은 나 혼자서 선택한 것이므로

진정 나의 것이다.

 

나는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소유한다.

내 몸과 내 몸이 하는 모든 것

노여움이나 기쁨, 좌절, 사랑, 실망, 흥분....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들

내 입과 거기서 나오는 공손하거나 달콤하거나 거칠거나

옳거나 틀린 모든 말들

나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나의 모든 행동들

 

나는 나의 꿈과 희망과 공포심을 소유한다.

나는 나의 모든 업적과 성공, 실패와 잘못을 소유한다.

 

내가 나 자신을 친절하고 사랑스럽게 대하는 한

나는 용감하고 희망차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고

내 자신에 대해서도 좀 더 잘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고 들리든,

무엇을 말하고 행동하든,

또 주어진 순간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건 그 모든 것은 나다.

 

나는 나의 주인이며 나는 나를 조절할 수 있다.

나는 나이며 나는 괜찮다.

 

버지니아 사티어 [나의 자존심 선언] 중에서

 

의심을 품는 것은 찬양 받을 일이다! 당신들에게 충고하노니

당신들의 말을 나쁜 동전처럼 깨물어보는 사람을

즐겁게 존경하는 마음으로 환영 하여라!

당신들이 현명하여 너무 믿을만한 약속은

하지 않기를 나는 바랐었다.

 

역사를 읽고 무적의 군대가

혼비백산 도주하는 것을 보아라.

곳곳에서 난공불락의 요새가 함락되고

출범할 때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던

무적함대가 돌아올 때는

몇 척 안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느 날인가 사람이 올라갈 수 없었던 산봉우리 위에 한 사나이가 올라섰고

끝이 없다고 믿었던 바다의 끝에

한 척의 배가 도달했다.

 

확고 불변의 진리를 부정하면서

오 멋져라, 머리를 옆으로 흔드는 것은 !

구할 길 없어 포기한 환자에 대하여

오 과감해라, 의사의 치료는 !

 

모든 의심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그러나

겁 많고 허약한 사람들이 머리를 쳐들고 일어나

그들을 억압하는 자들의 강력한 힘을 이제는 더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

 

, 얼마나 힘들여 하나의 교리는 쟁취 되었던가 !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루었던가 !

이것은 꼭 이러한 것이지 대충 그러한 것이 아님을

알기까지는 얼마나 어려웠던가 !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어느 날 한 사람이 그 교리를 지식의 비망록에 써 넣었다.

 

아마 오랫동안 그것은 그 책에 수록되어 있었고, 많은 세대가

그것과 함께 살아오면서 그것을 영원한 지혜로 알고

전문가들은 그것을 모르는 모든 사람들을 경멸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다음에 불신이 생겨났을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경험이

그 교리에 의혹을 품게 만들기 때문이다. 의심이 일어난다.

그리고 언젠가 뒷날 신중하게 어떤 사람이 지식의 비망록에서

그것을 지워버린다.

 

사방에서 울려오는 명령을 받으면서, 수염을 기른 의사들에게

자기의 유용성 여부를 검사 받으면서, 황금빛 훈장을 단

눈부신 인사들에게 검열을 받으면서, 하느님이 스스로 만드신 책을

귀에다 대고 떠들어대는 엄숙한 목사들의 경고를 받으면서,

참을성 없는 선생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가난한 사람은 서서 듣는다.

이 세계가 모든 세계들 가운데서 가장 좋은 세계이며

자기 방의 천장에 뚫린 구멍도 하느님이 손수 계획하신 것이라고.

진실로 가난한 사람이

이 세계에 대하여 의심을 품기는 힘들다.

자기가 살지도 않을 집을 짓는 남자가 땀을 뚝뚝 흘리면서 허리를 굽히고 일한다.

자기가 살집을 짓는 남자도 땀을 뚝뚝 흐르면서 고된 일을 한다.

 

절대로 의심할 줄 모르는 생각 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의 소화능력은 놀라웁고, 그들의 판단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들은 사실을 믿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믿는다. 필요한 경우에는

사실이 그들을 믿어야만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그들의 참을성은

한계가 없다. 논쟁을 할 때

그들은 첩자의 귀로 듣는다.

 

절대로 의심할 줄 모르는 생각 없는 사람들을

절대로 행동할 줄 모르는 생각 깊은 사람들이 만난다.

이 생각 깊은 사람들은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단을 피하기 위해서 의심한다. 그들은 자기의 머리를

오직 옆으로 흔드는 데만 사용한다.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은 침몰하는 배의 승객들에게 물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살인자가 치켜든 도끼 아래서

그들은 살인자 역시 인간이 아닐까 자문한다.

이 일은 아직도 충분히 연구 검토되지 않았다고

중얼거리면서 그들은 잠자리에 들어간다.

그들의 활동은 우유부단함을 본질로 한다.

그들이 애용하는 말은, 아직도 결단을 내릴 단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당신들이 의심을 찬양하더라도

절망적인 것을 의심하는 것은 찬양하지 말아라 !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의심할 수 있는 능력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

너무 빈약한 근거에 만족하는 사람은

잘못 행동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 많은 근거를 요구하는 사람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위험 속에 머물게 마련이다.

 

이제 한 사람의 지도자가 된 당신은 잊지 말아라.

당신이 옛날에 지도자들에게 의심을 품었었기 때문에,

당신이 지금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

그러므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의심하는 것을 허용하라 !

브레히트의 [의심을 찬양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