啐啄同時-나의 교육

단군 신화 그 이후

nongbu84 2015. 3. 4. 14:18

 

간으로 거듭 태어난 곰의 이야기(단군 신화 그 이후의 뒷이야기)

 

환인의 아들 환웅이 늘 천하에 뜻을 두어 인간 세상을 탐구하였다. 이에 환인은 환웅의 뜻을 알고 아래로 삼위 태백을 내려다보매 가히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할 것이라 하였다. 이에 천부인(하늘에서 내려준 인장이나 증표) 세 개를 주어 내려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3천명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 내려와 그곳을 신시라 이름하였다. 그리고 바람, 구름, 비를 관장하는 자들을 거느리고 곡식, 질병, 목숨, 형벌, 선악, 등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의 일들을 주관하여 인간 세계를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이 때 곰과 호랑이가 나타나 인간이 되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환웅이 그들에게 쑥 한 줌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곰과 호랑이가 이것을 받아먹고, 곰은 21일만에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호랑이는 삼가지 못해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여자가 된 웅녀는 더불어 혼일 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배게 해 달라고 빌었다. 이에 환웅은 사람으로 변신한 뒤 웅녀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삼국유사에서

 

이 신화에 나오는 곰은 자신이 인간으로 거듭 태어나기 위해 고통만이 존재하는 동굴 속으로 찾아 들어갔다. 그곳은 제 살을 깎는 고통만이 존재하였고, 등짝에 달라붙은 배고픔만이 있었으며, 살을 에이고 뼈 속까지 파고드는 추위만이 존재하는 어둠의 동굴이었다. 곰은 인간으로 탄생하기 위하여 배고픔과 불편함만이 존재하는 생활의 조건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 곰이 믿을 수 있었던 재산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뿐이었고,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해답뿐이었다. 자신의 변화에 대한 믿음이 있었으며, 자기의 삶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어둠의 동굴 속에서 100일 이라는 시간은 곰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의 시간이었고, 자기를 미워하면서도 감싸안는 자기와의 싸움의 시간이었다. 다만 그가 믿고 싶은 것은 동굴 속의 100일이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자 공간이라는 사실뿐이었다. 곰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마음과 싸워야 했다. 우선 그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도 없을 거라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싸워야 했고, 편히 쉬고 싶고 배부르게 먹고 싶고 잠자고 싶은 자신의 본능과 싸워야 했고, 지레 짐작하고 자포자기하려는 마음의 병과 싸워야 했고, 포기하고 떠나는 호랑이를 뒤쫓아가고 싶은 충동과의 치열한 싸워야했다.

 

조그만 틈만 생겨도 자신이 선택한 길이 잘못 선택한 길이 아닐까 하는 존재의 불안과 직면하였다. 그 때마다 그는 외로움에 시달렸으며, 사막에 혼자 선 막막함에 눈물 흘렸다. 아무리 울부짖어도 소리조차 나지 않는 가슴의 아픔을 마주보아야 했다. 어쩌다 자신의 울부짖음을 듣더라도 그 울부짖음은 자기 혼자 들어야 하는 실존이 더욱 무서웠다. 울부짖고 다시 그 울부짖음을 들어야 하는 것은 자신 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들어줄 리 없는 울부짖음이 다시 자신 속으로 파고들 때마다 그는 삶의 견고한 고독에 치를 떨어야 했다. 쑥 한줌과 마늘 스무 쪽이라는 외부조건의 열악함보다는 그 열악하고 불리한 조건 속을 견디지 못하고 발버둥치는 자신의 마음이 더 상대하기 힘든 것이었다. 오히려 그 불리한 상황을 탓하면서 도망치고 싶은 자신의 마음이 더 큰 문제였다. 하지만 곰은 미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아니 믿을 것이라곤 자신의 변화에 대한 열정과 정성뿐이었다. 힘들어하면서도 온 정성을 다하는 자신을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힘들어하고 못나고 일그러진, 그래서 아주 나약한 모습도 자신의 일부분으로 여기고 껴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나약함을 껴안으면서 미래에 대한 정성을 기울이는 일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곰은 그 어려운 <자기 변화의 시기>를 단순히 참아낸 인내의 화신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 변화의 시기를 적극적으로 선택하여 거듭 태어남의 노력을 기울이는 운명의 개척자였다. 그는 주어진 운명의 화살을 맞고 쓰러졌던 나약한 인간이 아니라 자기 삶을 선택하여 책임을 지는 주체적 실존의 개척자였다. 결국 곰은 이 자기 싸움과 변화의 노력을 거친 후에야 자신 속에서 이루고자 했던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만들 수 있었다. 그에게 <100일이라는 신화탄생의 시간과 공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가능성을 입체적으로 실현시킬 수가 있었다. 만약 그에게 고통과 불편함만이 존재하는 신화 탄생의 기회가 없었다면, 그는 하고 싶은 소망을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전환시키고, 가능성을 현실로 증명하는 일을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에게 운명을 개척하는 동굴의 어둠이 있었으므로 곰은 자기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가 있었다.

곰이 인간으로 거듭 태어난 이후로 인간은 끊임없는 <자기 변화와 거듭 태어남>을 도전해왔다. 이제는 우리에게 그 도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우리가 거듭 태어나야 할 당사자들이 되었다.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고,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내 눈앞의 현실이 되었다. 오히려 이 현실은 내 삶을 가로막는 장애물도 아니고, 도망치고 싶은 현실도 아니다. 다만 자기 운명을 개척할 단순한 기회로서 찾아 온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은 자기 변화를 시도했던 신화의 공간과 시간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일 뿐이다. 이 신화의 다리만이 우리가 건너야 할 다리일 뿐이다. 비껴 갈 수도 없고 돌아갈 수도 없는 삶의 유일한 다리일뿐이다. 사람은 삶의 어느 한 시기를 적어도 자기를 거듭나게 하는 신화의 공간과 시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왜냐면 우리는 이 상황과 이 상태에서 주저앉아 울기에는 너무 많은 인생의 시간이 남아있고,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이 너무 아깝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를 사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은 우리에게 외로움과 성실함, 불편함만을 줄 것이다. 다만 변화의 조건으로 미래에 대한 꿈과 가능성, 정직한 소망만을 주었다. 그리고 예외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것은 희망 있는 패배가능성 있는 좌절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