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主之權-나의 철학

길 위에 서다

nongbu84 2015. 4. 24. 10:08

길 위에 서다

 

지도에 난 길은 사람이 걸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이 걷는 길을 걷습니다. 사람이 걷는 길은 정해지지 않습니다. 이미 있던 길도 걷지 않으면 사라집니다. 걷지 않으면 모두가 자갈밭입니다. 문은 벽에 내는 것처럼 길은 아직 없는 곳에 냅니다. 걸으면 없던 길도 생깁니다. 걸으면 모두가 길입니다.

 

잇몸이 간지럽던 시절, 어머니 치마폭을 잡고 5일장으로 가는 고개 길을 걸었습니다. 머리에 돈 사러 갈 콩이며 팥을 이고 그 황토 길을 넘었습니다. 어머니는 발품을 팔아 얼굴로 빚 갚으러 길을 걸어갔습니다. 얼굴 마주치며 그 동안의 안녕을 묻고, 안녕하지 못한 소식을 더 많이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장에서 바람 따라 전해 온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바람이 전할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누나 셋은 바람 따라 시집을 갔습니다.

 

솔숲 사이로 난 길을 걸었습니다. 봄의 그 오솔길은 소나무 꽃가루가 눈을 뻑뻑하게 하고 코끝을 간질이는 길입니다. 나무에서 나오는 설익은 냄새가 풋풋합니다. 여름의 그 초록 길은 오롯하게 푹푹한 열기가 그늘을 덥히는 길입니다. 여름 숲길은 바람만이 빼곡한 사이를 파고 들고 촘촘한 잎사귀만이 그늘을 만듭니다. 나뭇잎에 소나기라도 내리면 그 시원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가을의 그 낙엽 길은 걷는 걸음이 침묵을 잠 깨우는 운치가 있습니다. 바스락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가 마음에 쌓여 수북한 외로움을 안깁니다. 겨울의 그 눈길은 고요한 평화가 두 손 모아 비비게 합니다. 아무도 걷지 않은 눈 덮인 길은 처음으로 길을 내는 길입니다. 함부로 걸을 일은 아닙니다.

 

아무도 걷지 않은 겨울 눈길을 걸어 학교를 갔습니다. 그 길은 개울 따라 난 길이었습니다. 물길은 사람이 가는 길을 이끌었습니다. 물길을 따라 난 눈길을 저벅 저벅 걷는 시간은 새벽입니다. 바람벽에 문을 내고 그 문을 열며 한 걸음 한 걸음 걷습니다. 소걸음을 닮습니다. 눈길에 발이 푹푹 빠져 서두를 수도 없습니다. 사람에게 가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마음에도 물길을 따라 걷는 길이 있습니다. 그 물길을 따라 함께 걸으면 그게 사랑입니다.

 

함께 걷는 길이 좋습니다. 사람이 만나면 눈길이 트이고, 눈길을 따라가면 말길이 열리고, 말길이 트이면 맘길이 열리고, 맘길이 열리면 따뜻한 손길을 잡습니다. 따뜻합니다. 손길을 잡으려면 발길을 옮겨야 합니다. 손을 잡고 걷는 발길이 사람이 가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