閼雲曲 -시

감나무 정류장에 비가 오다

nongbu84 2017. 5. 1. 12:00

감나무 정류장에서

 

감나무 정류장에 비가 내리고 있다

연두 비옷을 입은 감잎은

고요한 뒤란의 잔바람을 반쯤 말아 다독이며

목을 뒤로 제낀 채 온 얼굴로 비를 맞고 있다

빗줄기 내리쳐도 한 번도 파고들 수 없었던,

단단한, 버스 정류장의 기다림도

맨 몸으로 비를 맞고 있다

파란 비옷을 입은 소녀의 왼손은

아버지의 오른쪽 일상을 붙잡고

감나무 밑에 서서 파랗게 떨고 있다

우산을 쓴 아버지의 왼쪽 어깨가 젖는 동안

리어커를 끌고 등 굽은 노인이 지나 간다

한 생애가 흠뻑 젖어 폐지처럼 무겁다

매끈매끈한 절망의 등짝으로 비는 내려

저녁이 앙상하게, 아주 야속하게 드러났다

흐드러진 감꽃은 쏟아져 내리고

집집마다 바깥등을 애써 켜 보지만

사라진 처마의 생애를 보여줄 뿐 이었다

비오는 정류장에서 가슴 속 혼잣말이

비에 젖어 부풀어 올랐지만 내뱉지 못하고 있다

세상 살다 보면 입 안에서 맴돌다

가슴으로 돌아가는 혼잣말은 얼마나 많은가

빗속에서 우체통만 무릎 곧게 세워

되돌아오는 엽서를 받지 않으려

바짝 몸을 긴장한 채 서서 붉게 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