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건너 지붕 빨간집
강 건너 지붕 빨간 집
강 건너 언덕에 지붕이 빨간 집이 한 채 있습니다 그 집에 가면 뒤꼍 장독대를 둘러싼 담에 기대 살구나무 한 그루 서 있고 돌로 쌓아올린 담 틈새로 담쟁이 넝쿨 순이 쭈볏거렸습니다 앞마당엔 대문의 기둥처럼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서 눈썹이 새카만 아버지를 기다리며 노란 귓밥을 파내는 날이 많아 나무 밑엔 수북하게 은행잎이 쌓였고 처마 밑엔 제비가 집을 지어 새끼를 키우고 날아갔습니다.
그 집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오래도록 파란 힘줄 돋아난 강물의 근육을 바라보며 파랗게 굴뚝 연기를 물들였을 것이고 붉게 타는 강의 저녁에는 귓 볼 빨간 연애 편지를 썼을 것이고 산 그림자가 덥석 넘어지는 저녁이면 귓속 가득 달빛이 쌓였을 것입니다 문 앞 사립문에 부고장이 꽂히는 날이면 늙은 황소 한 마리가 워낭 소리를 울리며 뒷산 계곡으로 울음소리를 울렸습니다 계곡에선 보랏빛 도라지꽃이 몸서리치며 한 뼘을 더 자라 올랐습니다.
나는 그 집을 보면 빨간 스웨터를 입고 쪼그려 앉아 햇살을 받으며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얼굴을 그리던 누나가 떠올랐습니다. 자갈이 오줌 누는 소리를 들려주며 강바닥의 깊이에 대하여 은빛 연어가 떠난 먼 여행의 끝에 대하여 오후 5시 땅거미 지는 저녁의 기다림에 대하여 한 밤 대숲 달빛의 침묵에 대하여 새벽 물안개 피어오르는 계곡의 고요에 대하여 물푸레 나무의 직설적이고 맑은 화법으로 이야기 하던 누나, 내 마음에 투영된 빨간 스웨터는 더욱 빛났습니다
나는 그 집의 풍경을 좋아하지만 그 집 우물에 얼굴을 들여다보던 추억을 더 좋아합니다 우물 속에 비친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과 장소하늘소 기어오르는 참나무를 한참 들여다 볼 때 문득 우물 속으로 텀벙 두레박처럼 던져지던 누나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터질 듯 옹다문 빨간 입술 그러고는 내 등에 얹던 누나의 더운 손길 귓속으로 파고드는 바람의 숨소리 나는 그날 심장이 멎은 것처럼 가슴에 화인을 새기고 내 등엔 누나의 지문이 새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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