閼雲曲 -시

돌배나무

nongbu84 2017. 9. 20. 14:53


돌배나무

 

손닿을 듯 싶지만 막상 꽃향기라도 맡으려면 찬물에 발빠져 건너야 하는 곳에 산다 개울 너머 자갈 무덤에 뿌리박고 서 있어 살아보고 난 먼 훗날 생각하면 삶과 죽음의 거리만큼이나 가깝고도 먼 거리일 게다 잎도 나기 전 제 몸을 온통 뒤덮던 꽃송이들이 소복에 숨겨진 청상과부의 어깨선처럼 다소곳하고 고고하게 펼쳐진 능선이다 이리도 애처롭게 아주 하얀 차양막을 치는 슬픔이 또 있을까

 

산새와 벌들이 서럽게 울다 흥건하게 취해 돌아가고 송화 가루 뭉게뭉게 피어올라 산허리를 맴도는 봄의 저녁이 끝나면 소나기는 올 듯 바람은 불고 똥은 마렵고 괴타리는 옹쳐 있고 잎사귀는 뒤집히고 향기에도 간이 배는 전전긍긍(戰戰兢兢)의 여름이다 꽃잎 하나 들어 올 리 없는 그늘 이다만 몸 하나 덮어 주는 품이고 싶은 바람은 있어 천둥 번개가 뺨 다구 날리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다 그 여름 저녁 산판 능선이 짙은 연두색으로만 번지듯 그리운 것들로만 번져가는 마음 그게 문제다 온 하루 내내 제 꽃잎 한 장 한 장 뜯어내, 끝내는 모두 뜯어내 날리는 그리움을 어찌 당해낼 재간이 있을까

 

꽃눈이 하염없이 내려 소복하게 쌓이고 연못 덮던 여름의 산 그림자가 사라지면 가을비는 돌배의 울퉁불퉁한 무릎을 씻어내기 바쁘다 가을 저녁이 애틋한 건 그게 돌덩이처럼 단단하다 싶지만 드러나는 곳마다 상처 아닌 곳이 없고 덧나 패인 곳 꿰맨 옹이를 가릴 수 없기 때문이다 저 맨 몸에 얼마나 많은 천둥 번개가 치고 비바람 불고 우박이 내리고 산새의 부리가 쪼아댔을까 제 속의 울음이 들리면 또 얼마나 몸서리쳤을까

 

그래도 젖은 몸 말려 영그는 데는 가을 땡볕만한 게 없다 그 따가운 햇살은 모든 걸 속속들이 영글게 하는 재주가 있어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을 영글게 하고 결국엔 주렁주렁 열린 돌배도 영글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땡볕은 멈추지 않고 돌배나무가 제 슬픔의 잔을 거두어 허영(虛榮)의 잎을 떼어내고 탐스런 열매마저 떨구고 제 맨 몸의 뼈만이 남아 더 가벼워 질 때까지 가을 내내 고집스럽게 내리쬔다

 

땡볕에 영근 가을의 냇물은 모든 걸 받아내 제 몸 위에서 춤추게 하는 일을 좋아하는지라 가장 가볍게 떠서 춤추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것들을 사랑한다 그 맘을 아는 돌배나무는 제 열매조차 떼어내고 제 몸조차 베어내 끝내는 사라지려 삶의 너머 저쪽으로 비스듬히 자주 기운다 제 가지 마다 침묵이 소복하게 쌓이는 아침마다 돌배나무의 왼쪽 어깨가 흔들리는 건 부처님 말씀을 몸에 새기는 육신 공양의 길을 떠나고 싶은 오직 한 마음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