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전야
폭풍전야(暴風前夜)
- 매저키즘(Mashochism) 혹은 화광동진(和光同塵) -
그 아이는 어른이 되었다 일본 선생 앞에서 조선 학생 두 아이가 서로의 뺨을 갈기는 장면을 TV에서 보았던, 해병대 출신 담임 밑에서 엄석대처럼, 그 엄석대처럼 대걸레의 권력을 휘둘렀던, 군대에서 머리박고 맞으면서 질서와 평화를 내면화했던, 그 아이는 자라
자기 검열이 심한 선생이 되었다 어느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걸까 햇볕은 몸을 토막 낸 무 깍두기처럼 직사각형으로 바닥에 정렬해 있다 천정에서 늙은 오이가 뱉어 내는 시간을 따라 침묵이 쏟아져 내린다 그는 빈 교실 한 귀퉁이에서 수인囚人처럼 고요하게 쪼그려 앉아 있다
창밖으로 앞산 노을이 보이는 곳, 교실을 탈출하려던 비둘기가 유리창에 머리 부딪쳐 죽고, 제 울음을 소거한 석양이 창턱에 걸터앉았다 음音을 소거하고 자막字幕으로만 보는 멜로물 같은 저녁 하늘, 버퍼링을 반복하다가 마침내 멈춘 절정의 노을, 그럴 때면 고립 자체가 하나의 삶이므로 가끔은 도마 위의 물고기처럼 고독할 권리도 있다
빈 교실 바닥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본다 그림자는 기억을 담은 한 편의 영화였으므로, 기억은 기록이 아닌 해석이었으므로 어떤 일도 불편하지 않았다 그림자의 몸에서 녹슨 못 하나를 빼 낸다 못이 빠진 구멍 속에서 한 무리의 개미가 몰려나와 콘크리트 벽으로 기어들어간다 벽에 금을 긋는 오래된 습성은 아직도 빈틈없이 이어지는 개미의 가업, 그 틈으로 마지막 햇볕이 새어나와 티끌 안으로 스며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필사적으로 들이 마신다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햇볕을, 고립의 종족은 제 정체 밝혀진 먼지의 파란 절망을 안다 절망을 움켜쥐면 비로소 돋는 손등의 힘줄, 침묵을 부수기 위해 호두알처럼 울퉁불퉁 성난 주먹 열 뼈마디가 욱신거린다 아직 창문은 고요하다 곧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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