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gbu84 2018. 11. 7. 15:21

 

단풍

 

옷소매 단아하게 접고 한 생애를 춤추던 곡예사가 있었으니 그는 온 뺨을 붉게 물들이고 마음까지 온전하게 물들이지 않으면 무대에 서는 법이 없었다 허공에서 줄타기 할라 치면 거미가 수직으로 낙하하여 대롱대롱 매달리듯 하다가도 물위를 둥둥 떠다니듯 하다가도 나비처럼 사뿐거렸다 살랑살랑 알랑방귀 뀔 때면 사람 마음 환장하게 애간장을 태우다가도 수평으로 휙휙 날렵하게 제 몸을 잡아채어 허공을 가를 때는 그 솜씨가 칼날 춤추듯 날카로웠으니

 

붉은 뺨 저리 곱고, 허무虛無같은 춤사위 저리 가벼웠으니 나 길을 잃어도 좋았다

 

그가 한바탕 마당 공연을 끝내면 무대 뒤에서 분칠한 얼굴을 지웠다 검은 얼굴에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그물처럼 얽힌 혈관이 드러나는 외줄 위의 처연한 이면裏面, 고양이 새끼들 함께 모여 살다 뿔뿔이 흩어져, 세상 떠돌다 다시 모여들 듯, 한 생애를 마치면 지가 자란 폐허의 마당으로 하나 둘 모여 들었으니 재주꾼의 은 아직 끝나지 않았던 거라, 마지막 마음은 서로가 서로를 덮으며 땅속으로 스며드는 일이었으니 죽어서도 외롭고 쓸쓸하지 않기를 빌며 죽음까지 스며드는 사랑이었다 사람 마음 아주 새빨갛게 물들어 스며들고, 스며들어 번지는 데 저 만한 재간才幹이 또 있을까

 

길을 잃어야 당신에게 가는 길이 열렸으니 빗장뼈에 떨어지는 단풍 한 잎으로도 나 심장까지 붉게 물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