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행시초(南行詩抄)- 백석(白石)
창원도(昌原道)
- 남행시초(南行詩抄) 1
솔포기에 숨었다
토끼나 꿩을 놀래주고 싶은 산(山)허리의 길은
엎데서 따스하니 손 녹히고 싶은 길이다
개 더리고 호이호이 회파람 불며
시름 놓고 가고 싶은 길이다
괴나리봇짐 벗고 땃불 놓고 앉어
담배 한 대 피우고 싶은 길이다
승냥이 줄레줄레 달고 가며
덕신덕신 이야기하고 싶은 길이다
더꺼머리 총각은 정든 님 업고 오고 싶은 길이다
*궤나리봇짐 : 개나리 봇짐. 양쪽 어깨에 매는 봇짐
*따ㅅ불 : 땅에 피우는 막불
*덕신덕신 : 덩실덩실, 흥겹게. 사람이나 동물들이 떼로 모여 움직이는 모양
*덕거머리 총각 : 장가들 나이가 지난 사내로 머리를 땋아 늘어뜨린 총각
통영(統營)
― 남행시초(南行詩抄) 2
통영(統營)장 낫대들었다
갓 한닢 스고 건시 한접 사고 홍공단단기 한감 끊고
술 한병 받어들고
화륜선 만져보려 선창 갔다
오다 가수내 들어가는 주막 앞에
문둥이 품바타령 듣다가
열이레 달이 올라서
나룻배 타고 판데목 지나간다 간다
*낫대들었다 : 낮에 들었다. 낮 때가 되어 장에 들어갔다.
*홍공단단기 : 붉은 공단천으로 만든 댕기.
*화륜선 : 이전에 기선(汽船) 을 이르던 말.
*가수네 : 가시네. 여자아이.
*판데목 : 경남 통영의 앞바다에 있는 수로 이름으로 1932년 해저터널이 완성된 곳이다. 판데다리라고도 하며 옛날에는 달고보리라고 했음.
고성가도(固城街道)
― 남행시초(南行詩抄) 3
고성(固城)장 가는 길
해는 둥둥 높고
개 하나 얼린하지 않는 마을은
해밝은 마당귀에 맷방석 하나
빨갛고 노랗고
눈이 시울은 곱기도 한 건반밥
아 진달래 개나리 한창 퓌였구나
가까이 잔치가 있어서
곱디고흔 건반밥을 말리우는 마을은
얼마나 즐거운 마을인가
어쩐지 당홍치마 노란저고리 입은 새악시들이
웃고 살을 것만 같은 마을이다
*얼린하지 않는 : 얼씬도 하지 않는.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는.
*시울은 : 환하게 눈이 부신.
*건반밥 : 잔치 때 쓰는 약밥.
삼천포(三天浦)
― 남행시초(南行詩抄) 4
졸레졸레 도야지새끼들이 간다
귀밑이 재릿재릿하니 볕이 담복 따사로운 거리다
잿더미에 까치 오르고 아이 오르고 아지랑이 오르고
해바라기 하기 좋을 볏곡간 마당에
볏짚같이 누우런 사람들이 물러서서
어느 눈오신 날 눈을 츠고 생긴 듯한 말다툼 소리도 누우라니
소는 기르매 지고 조은다
아 모도들 따사로히 가난하니
*츠고 : 치고.
*기르매 : 길마. 짐을 실으려고 소의 등에 얹는 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