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든 손이 가장 훌륭한 도서관입니다.
책을 들고 있는 손이 가장 훌륭한 도서관입니다. 가장 훌륭한 도서관은 헌책방에서 책을 골라 버스를 타고 가면서 책을 읽을 때, 그 책을 잡은 손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의 일이었습니다. 서울로 유학와서 생활하다가 여름방학에 고향에 내려갔습니다.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걸어서 십여리를 가다보면 동리 밖 느티나무가 반겨주었습니다. 헤어졌던 마당을 밟아보고 낯설게 달라붙은 마루 처마의 거미줄과 인사하고 축축하게 젖은 청솔타는 연기로 기침을 하며 한 동안의 이별을 달랬습니다.
그날도 어머니는 저녁을 드시자 마자 피곤에 지쳐 쓰러지셨습니다. 점잖게 잠을 잔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고된 노동을 하신 하루였습니다. 참깨를 털면서 싸락싸락 싸락눈같은 슬픔을 털어낸 하루였습니다. 참깨가 쏟아질라 곧추 세워 들고 펴 놓은 멍석에 흠씬 두들겨 패면 새모이같은 참깨가 쏟아졌습니다. 이놈은 맞을 수록 제 것을 털어냈습니다. 문지방 넘나들던 아버지에 대한 추억도 털고, 세상 풍문으로 들리던 죽음의 부고도 털어냈습니다. 그날 저녁 호박꽃처럼 노란 달이 떠올랐습니다. 창호지 문틈으로 달빛이 새어 들었고, 덩달아 문풍지도 바람에 울었습니다. 체로 받쳐 만든 창호지를 통해 달빛은 어스름하게 방안을 비추었습니다. 어머니는 모로 누워 고단한 하루를 누이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어머니 손을 잡았습니다. 아, 그때의 충격, 까칠한 가시가 손을 파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갈래갈래 굽이친 어머니 손금의 계곡이며 산말랭이 능선에 돋아난 가시나무를 보았습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싸락싸락 모이같은 눈물을 뿌렸습니다.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그 거칠은 손의 손톱을 한번도 깍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손톱을 깎는 모습을 본적도 없었으며 실제로 깎은 적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밭일에 호미질에 닳았기 때문입니다. 손을 생각하면 그때의 일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
3월 개학을 하고 나면 첫 시간 나는 아이들과 한 명 한명 악수를 합니다. 손잡고 악수하는 인사를 나눕니다. 찬 손이 있고, 따뜻한 손이 있으며, 굳은 살이 박힌 손이 있습니다. 씨름을 하는 아이들과 피자배달하며 오토바이를 밤마다 타는 아이들의 손에는 굳은 살이 박혀가고 있습니다. 약간의 옹이진 부분 몇 개와 단단함이 생활에 지쳐가는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아픕니다. 3월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어머니의 손을 잡던 내 경험을 전해주며 어머니 손을 잡아 보기와 아버지 발 닦아드리기 숙제를 내줍니다. 내가 검사할 수 없는 숙제지만 잘 하는 녀석들이 있습니다. 쑥스러워 어머니 손만 잡고 아버지 발은 닦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손을 잡아보며 어머니의 삶을 느끼고 아버지의 굳은 발을 통해 40년 이상 세상을 걸어온 그 삶을 느꼈으면 하는 바램에서 입니다.
요즘 손이 가장 훌륭한 도서관일 것 같습니다. 지난 번 도서관 활성화를 위한 교사 모임을 가지면서 책이 있어야 할 곳은 멋진 도서관의 책꽂이도 아니고 자기 집 서가의 맨 위 칸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서관 보다는 학급 교실이 학급 교실보다는 자기집 서가가 자기집 서가보다는 각자의 손이 가장 훌륭한 도서관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방에서 책을 골라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잉크 냄새 맡으며 읽는 한 구절이 가슴에 남는 법입니다. 선생님한테 받은 책선물을 넘겨보며 서문에 써있던 한 구절 " 뜻을 세워라" 한 구절이 가슴밭에 심어지는 씨앗입니다. 저녁 시간 애인을 기다리며 카페에 앉아 읽는 한편의 시가 영화가 되고 심금을 울리는 가락이 됩니다. 여행 가방에서 가지런히 접힌 페이지의 한 구절이 영혼을 울리는 한마디가 됩니다. 손이 우리의 가장 훌륭한 도서관입니다. 손에 책을 들고 다니는 모습의 풍경이 곧 다가올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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