閼雲曲 -시 318

일몰 측량사

일몰 측량사                                                                                                                                             박 승 균 먼 바다 파랑주의보가 내렸지만 쨍쨍한 하늘, 소한치고는 포근한 날씨였습니다 그대가 살던 항구의 뒷골목을 지나 안내도에서 사라진 꼬들꼬들한 항로를 추억할 때 선착장에 정박한 목선의 깃발이 펄럭였습니다 만남보다는 이별이 익숙한 대합실, 대형 텔레비전 화면에선 목포의 눈물이 흘러 나왔습니다 채널은 상큼한 미래보다 비린 과거를 고정해 놓았습니다 노둣길을 가로질러 걸으며 훗날을 기약해야 했습니다 해안의 구비를 돌고 언덕의 고비를 넘어 남쪽의 맨..

閼雲曲 -시 2024.12.12

그해 봄

그해 봄박 승 균1   마을 공터에는 유채꽃이 활짝 피었지만 방문객은 하나도 없었다 볕이 종일 쏟아져 내렸으나 하루하루는 네모난 달력 속에 갇혔다 봄 잠바처럼 가벼운 불안이 일었다   2   시인은 방문을 닫고 외출한지 오래, 일상이 난간에서 대롱거릴 때마다 목련나무가 검은 꽃잎을 하나씩 뱉어냈다 텅 빈 거리를 길고양이 몇 마리가 쏘다녔다 사람들은 마스크를 쓴 채 말없이 뒷걸음치고 골목의 벽과 벽은 한 발짝씩 뒤로 물러섰다 대문 앞에 버려진 거울 속에는 금간 자화상으로 넘쳐났다   3   술집에서 낭만주의자 시인을 기다렸지만 미닫이문은 열리지 않았다 가시 돋은 혀로 서로의 고통을 찌르던, 주정 같은 사랑은 탁자 위에서 식어갔다 쭈그러진 한숨만 주전자처럼 놓여 있었다  4   쾍쾍, 숨쉬기 힘들어..

閼雲曲 -시 2024.12.03

천천

천천                                                                       박 승 균   흰 눈송이를 보다 깜박 잠들었는데왼쪽 어깨에 눈이 뭉쳐 있었다차창에 피어난 성에꽃을 닦아내니어느새 숨어있던 어둠도 사라지고하늘이 내린 냇가에 도착했다시린 눈발이 신발도 신지 않고 마중 나와 곱은 손을 잡아주는 곳천천히 둑길을 걸을 때 하천의 살얼음 밑으로 검은 새의 노래가 흘러갔다천천, 시간이 구름처럼 풀려나는 하천오래전 난간 없는 다리에 서서 아버지의 뒷모습을 흘려보냈다몇 계절의 산모퉁이를 지나 느릿느릿 다시 걸어왔을 때물에 잠긴 목소리 하나 들렸다아직도 아프신가, 나 여기 있네 소리에는 볕이 가득해서가만 어깨를 만져보니통증이 천천히 풀어져 내렸다

閼雲曲 -시 2024.11.29

오래된 영수증

후박나무                                                  박 승 균   여름 숲길에 서서 낚시질을 하고 있다   그림자를 지상에 길게 늘여놓고서오후 세 시의 나른함을 낚고 있다   지하의 심연 속으로 미끼를 던져놓고우듬지를 빼들어 응시하는데,   얼마를 기다렸을까   줄기가 곡선으로 휘어지려는 순간 넓은 잎들이 찰랑찰랑 흔들렸다   팽팽한 긴장으로 낚는 손맛의 전율,   숲이 바닥 가득 꿈틀거렸다   지나가던 노인 둘이 후박한 노목 그늘에 들어   얼굴을 지우며 더위를 쫓았다

閼雲曲 -시 2024.10.07

후박나무

후박나무                                                                                                박 승 균   여름 숲길에 서서 낚시질을 하고 있다   그림자를 지상에 길게 늘여놓고서오후 세 시의 나른함을 낚고 있다   지하의 심연 속으로 미끼를 던져놓고우듬지를 빼들어 응시하는데,   얼마를 기다렸을까   줄기가 곡선으로 휘어지려는 순간 넓은 잎들이 찰랑찰랑 흔들렸다   팽팽한 긴장으로 낚는 손맛의 전율,   숲이 바닥 가득 꿈틀거렸다   지나가던 노인 둘이 후박한 노목 그늘에 들어   얼굴을 지우며 더위를 쫓았다

閼雲曲 -시 2024.10.02

가을 지나 여기

가을 지나 여기                                                                                               박 승 균   무덤엔 가시넝쿨 잘라내도 다시 뒤엉켰다   서리 내려 살얼음 낀 아침을 걷다보면,   불쑥 용서받고 싶어 고개 숙이는 날이 많았다   좀 더 인정을 나눌 수 있었으나 아무도 사랑하지 못했다   부모 잃고 두 아이는 군대를 다녀와 집을 나갔고   아내는 늙어 자주 아프다   가을 하나 지나는 게 이렇게 어렵다   자작나무 숲이 있고   한 번 보고 가라는 붉은 샛강이 있고   오솔길처럼 외로운 시인도 알고 있지만   비탈 밭의 고춧잎과 산소 잔디가 시들어 가는데   선산(先山) 퉁갈나무 열매는 더욱 ..

閼雲曲 -시 2024.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