閼雲曲 -시

표본실의 호랑나비

nongbu84 2018. 11. 8. 12:50

 

표본실의 호랑나비

 

의로운 도둑질이 성립하다면 아름다운 도둑질도 가능하리라 맨 처음의 처음부터 남의 것을 훔쳐 제 몸엣것으로 만드는 신묘한 재주를 가진 도적이었으니

 

그는 무지갯빛 검은 색상에 주황의 무늬를 온 몸에 새겨, 딱 한 번 해 입으면 결코 벗을 수 없는 옷을 입고 몸때가 오면

 

한낮에도 도마뱀의 목도리처럼 꽃잎을 펼친 달개비의 꽃송이에 대놓고 들어가 그 은밀하다는 사랑의 밀어를 훔쳐 허락도 없이 중매하여 농익은 혼인을 엮어주고

 

사뿐사뿐, 너울너울, 신명나게 춤추며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불륜을 서슴없이 저지르다가도

 

우주의 밀서密書를 훔쳐와 제 몸으로 제본한 딱 두 장짜리 책을 펴면, 서문도 없이 곧바로 우주의 생동하는 본문만 나오고 후기나 부록이 없는 한 편의 우화寓話가 적혔으니 그 중 압권壓卷은 장자가 꿈속에서 나비를 본 것인지 나비가 장자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는 이야기여서 죽었던 민들레 씨앗이 벽 틈에서 피어나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었다

 

그가 한 최고의 도둑질은 사람 마음을 훔쳐간 것, 고샅에 찬 손 쓰윽 집어넣듯 마음 안주머니에서 지갑 같은 마음을 빼내 저릿하게 주물렀으니 바다에 놀러갔다가 허리춤에 새파란 초승달이 뜬 나비를 보았다는 사람이 있고 고양이의 깊은 눈 속에 나풀거리는 나비 같은 소요가 있다는 사람도 생겼다 나 같은 사람은 아버지 무덤에서 묘혈처럼 패인 상사화에 들어가던 호랑나비를 생각하며 고작 찢긴 나비 날개는 이 나간 도자기와 같다고 비유하는 것이다

 

나비는 겁 없이 우주의 사랑을 훔쳐 누설했기에 표본실의 유리무덤에 갇혔는데, 가슴 정 중앙에 실 핀을 꽂아 영원히 눈 감을 수 없는 형벌을 받는 것이다 그의 호랑이 눈은 아직 훔치지 못한 공허空虛의 춤사위를 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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