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한때에 관한 김성탄의 33절 (임어당, "생활의 발견"에서)
김성탄(金聖嘆)은 17세기에 살았던 위대한 인상파의 평론가로서 "서상기(西廂記)"라고 하는 희곡의 평석 가운데에서 33절에 이르는 행복한 때라는 것을 차례로 예로 들고 있다. 이 글들은 어느 때 그가 비에 길이 막혀서 한 친구와 열흘 동안 어느 절에 꼼짝 못하고 갇혀 있었을 때 둘이서 추려본 것이다.
♠ 때는 6월의 어느 더운 날, 태양은아직도 중천에 걸려 있고, 산들바람 한 점 없이 하늘에는 조각구름 하나 보이지 않는다. 앞뜰도 후원도 마치 가마 속같이 찐다. 하늘을 나는 새라고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고, 땀은 온몸을 폭포처럼 흘러내린다. 점심 식사를 하려고 해도 무더위에 숟가락을 들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돗자리를 한 장 가져오게 해서 땅바닥 위에 깔고 그 위에 벌렁 누워본다. 그러나 돗자리는 축축하고 파리 떼가 얼굴 근처를 날아다니며 아무리 쫓아도 영 달아나지를 않는다. 이렇게 되면 나는 완전히 맥을 쓰지 못하게 된다. 그러자 갑자기 우레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리더니 검은 구름이 첩첩이 하늘을 덮고, 싸움터로 향하는 대군처럼 당당한 기세로 몰려온다. 이윽고 처마에서 비가 폭포처럼 퍼붓기 시작한다. 그러면 땀은 걷히고 돗자리가 축축하던 것도 사라지고 파리 떼들도 어디론지 숨어버려 겨우 밥을 먹을 수 있게 된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닌가.
♠ 십 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한 친구가 해질 무렵에 갑자기 찾아온다. 문을 열고 그를 맞이한다. 배편으로 왔는지 육로로 왔는지는 묻지도 않고, 침대나 걸상에 앉아 잠시 쉬라는 말조차 하지 않은 채 곧장 내실로 들어가 아내에게 이렇게 말을 건넨다. "여보, 당신도 소동파의 부인처럼 푸지게 술 좀 사다 주지 않으려오?" 그러면 아내는 기꺼이 금비녀를 뽑아 들며 "이것을 팔도록 하지요." 하고 말한다. 우선 사흘 동안은 실컷 마실 수 있을 듯싶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닌가.
♠ 아무도 없는 텅 빈 방 안에 멍하니 나는 혼자 앉아 있다. 그러자 베갯머리로 쥐가 다가와 점점 성가시게 군다. 도대체 살금살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쏠고 있는 것일까, 내 어느 책을 쏠고 있는 것일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무서운 얼굴을 한 고양이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 듯이 꼬리를 움직이며 눈을 부릅뜨고 다가온다. 나는 숨을 죽인 채 꼼짝하지 않고 잠시 기다린다. 그러자 쥐는 순식간에 바삭 하는 소리를 남겨놓은 채 바람처럼 사라져버린다.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 서재 앞에 있는 해당화와 자형(紫荊, 박태기나무)을 뽑아버리고 열 그루인가 스무 그루의 싱싱한 파초나무를 심는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다.
♠ 봄날 저녁 낭만적인 몇 명의 친구들과 술잔을 나누어 상당히 취기가 돌았다. 술잔을 놓기도 싫고 그렇다고 더 마시는 일도 괴로운 일이다. 그러자 내 기분을 알아차린 곁의 동자가 열두서너 개의 커다란 폭죽을 넣은 광주리를 냉큼 갖다 준다. 나는 술상에서 떠나 마당으로 나가 폭죽을 터뜨린다. 유황 냄새가 코를 찌르고 머리를 자극하여 온몸이 매우 기분이 좋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 거리를 걷고 있는데 깡패 둘이서 무엇 때문인지 심하게 말다툼을 하고 있다. 얼굴을 충혈이 되고, 눈은 분노에 타고 있어서 마치 불구대천의 원수와 같은 형상이다. 그러나 서로 예의를 지킨답시고 팔을 올리고 허리를 굽신거리며 절을 하면서 댁은 말이죠 라든가, 댁에서 말이죠 어떻게 된 셈입니까 라든가, 그렇잖습니까 등등의 매우 점잖은 말을 주고받고 있다. 그러자 느닷없이 하늘을 찌를 듯한 험상궂은 사나이가 팔을 휘두르면서 나타나더니 어서 썩 꺼지지 못할까! 하고 외친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 물항아리에서 물이 흘러나오듯 우리 집 애들이 옛글을 줄줄 따로 외고 있는 모습에 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 식사를 끝낸 뒤 심심풀이 삼아 근처에 있는 가게를 찾아가 보니 조그만 물건이 갖고 싶어진다. 잠시 동안 흥정을 하며 웬만하면 조금만 더 깎아주었으면 좋겠는데, 가게 점원 아이가 아직 팔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 값을 깎는 정도의 값이 나가는 간단한 ㅁ루건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점원 아이에게 준다. 그러자, 점원 아이는 곧 빙그레 웃더니 정중하게 머리를 주아리며 말한다. ꡒ나으리께서는 아주 마음이 너그러우십니다.ꡓ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알이 아니겠는가.
♠ 식사를 끝낸 뒤에 심심풀이로 헌 가방을 열어 가지고 그 속에 든 물건을 뒤적거린다. 그러자 우리 집에서 돈을 꾸어준 사람들이 쓴 수십 장, 수백 장의 차용증서 뭉텅이가 나왔다. 빚진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미 고인(故人)이 된 사람도 있고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도 있다. 어쨌든 도저히 돈을 받아낼 가망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나는 몰래 그것들을 둘둘 말아 불에 태우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연기가 깨끗이 사라져가는 것을 바라다본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 어느 여름날, 맨머리 바깥으로 나가니 젊은이들이 수차(水車)를 밟으며 소주의 민요를 부르고 있기에 양산을 받고 서서 정신없이 귀를 기울인다. 밭의 물은 녹은 백은(白銀)이나 녹은 백설처럼 흰 거품을 내면서 수차 속으로 흘러들어간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 아침에 일어나니, 간밤에 동네 누가 죽었다고 집안 식구들이 수군거리는 모양이다. 나는 곧 누가 죽었느냐고 집사람에게 묻는다. 이어 그가 동네에서 말 못 하게 타산적인 좀팽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 여름날 아침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니, 물받이 홈통으로 쓰려고 사람들이 소나무 선반 아래에서 커다란 대나무를 톱으로 자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 한 달 동안이나 꼬박 장마가 들어서 주정뱅이나 환자 모양으로 아침이 되어도 일어나지를 않고 자리에 누워 있곤 했다.그러자 갑자기 날이 활짝 개었음을 알리는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부리나케 일어나서 침실의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여니, 아름다운 햇빛이 쨍쨍 내리쬐고 있고, 나무들은 마치 목욕을 하고 난 것처럼 싱싱하기 이를 데 없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 밤에 누군가 멀리서 나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다음날 나는 그 사람을 찾아간다. 그 집에 들어가 거실을 둘러보니, 그는 남쪽을 향해 책상 앞에 앉아 무엇인가 기록을 읽고 있다. 내 모습을 보자, 적이 고개를 끄덕이고 내 소매를 잡아 앉히더니, ꡒ마침 잘 왔?. 이것 좀 읽어보게나.ꡓ 하고 말한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서로 웃음을 나누고 담 위에 햇살이 사라질 때까지 즐거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이윽고 친구는 시장기를 느낀 듯 나에게 조용히 말한다. 자네도 배가 고픈가.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 자기 집을 지으려고 별로 벼르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뜻밖에 약간의 돈이 들어왔기에 어디 집을 지어볼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 뒤로는 자나 깨나 재목을 사 달라느니, 기와와 벽돌과 회를 사 달라느니, 못을 사 달라느니 성화 같은 재촉을 받게 되었다. 나는 그런 것들을 파는 거리는 샅샅이 빠뜨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모두가 역사(役事)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동안 새로 짓고 있는 집에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침내는 모두 다 집어치우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어느 날 겨우 집이 완성된다. 벽에는 흰 회칠을 하고, 마루는 깨끗하게 청소가 되었고, 문이나 창에는 종이를 바르고, 벽에는 서화를 걸고, 일꾼들은 모두 가버리고, 친구들이 찾아와서 단정히 여기저기 놓여 있는 걸상에 걸터앉는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 겨울 밤에 술을 마시고 있는 동안에 방 안이 몹시 추워진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된다.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니,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땅 위에는 벌써 서너더덧 치나 눈이 쌓여 있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 여름날 오후, 새빨간 큰 소반에다가 새파란 수박을 올려놓고 잘 드는 칼로 자른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닌가.
♠ 나는 오래 전부터 승려 되기가 소원이었다. 그러나 육식을 못한다기에 망설이고 있는데, 이제부터는 승려가 되어도 터놓고 육식을 해도 좋게 되었다고 하자. 자, 그렇게 되면 대야에다가 하나 가득 물을 데워 가지고 잘 드는 면도칼로 여름철이 지나기 전에 깨끗이 삭발을 한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닌가.
♠ 음부에 조그마한 습진이 몇 개 생겼으므로 문을 꼭 닫고는 가끔 더운 김을 쐬거나 더운 물에 담그거나 한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닌가.
♠ 우연히 가방 속에서 옛 친구가 보낸 자필의 편지를 발견한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닌가.
♠ 어느 가난한 선비가 나에게 돈을 꾸러 온다. 그러나 돈을 빌려 달라는 말은 쉽게 꺼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면서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려 한다. 아주 괴로우리라 생각하고 단둘이 있을 수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얼마나 필요하냐고 묻는다. 그리고 다시 방으로 들어와 돈을 내주고 나서 이렇게 말한다. ꡒ이 길로 가서 그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것이오? 그렇지 않다면 좀더 있으면서 술이나 한 잔 들고 가는 게 어떻겠소?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닌가.
♠지금 나는 조그만 배에 몸을 싣고 있다. 미풍이 기분 좋게 불어오나 돛이 없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지 큰 배 한 척이 나타나 바람처럼 빨라 다가온다. 나는 그 배로 가까이 가서 갈고리 쇠를 걸려고 한즉 뜻밖에 잘 걸린다. 그래서 그 배에도 줄을 걸고 끌어 달라고 한다. 그리고는 두보의 시를 읊조린다. ꡒ청석봉만 황지금유유(靑惜峰巒 黃知檎柚乳).ꡓ 그리고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린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닌가.
♠ 한 친구와 함께 살 집을 보러 다녔지만 마땅한 집이 없었다. 그때 누군가 찾아와서 적당한 집이 있다고 일러준다. 그다지 크지 않은 집으로 열두어 개의 방이 있고, 강에 면하여 있고, 아름다운 푸른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다고 한다. 나는 이 소식을 전해준 사람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어떻게 생긴 집인가는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어슬렁어슬렁 집 구경을 간?.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커다란 빈터가 있고 곡물 창고가 예닐곱 개나 서 있다. 그 순간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이제부터는 야채나 참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닌가.
♠ 길을 떠났던 나그네가 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다. 그리운 성문이 보이고, 강 양쪽 기슭에서는 아낙네들과 애들이 고향의 사투리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닌가.
♠ 오래된 사기 그릇이 깨지면 아무리 애써 보았자 먼저대로 되지 않는 것은 뻔한 사실이다. 깨진 그릇을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면서 들여다보면 볼수록 화만 더 난다. 그럴 때에는 그 깨진 그릇을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내주며 다른 낡은 그릇과 같이 쓰라고 하면서, 한번 깨진 그 그릇을 또다시 내 눈앞에 띄지 않도록 하라고 명령한?.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닌가.
♠나는 성인군자가 아니기에 불선(不善)으로 향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밤중에 그 어떤 불선으로 향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그 때문에 불쾌하기 이를 데 없다. 그때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불선을 감추지 않는 것은 참회함과 같다고 한 불교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나는 알지 못하는 사람이거나 옛날 친구이거나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향했던 불선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닌가. ♠ 아래위 한 자나 됨직한 커다란 글씨를 누군지 쓰고 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닌가.
♠ 창문을 열어젖히고 방에서 말벌을 내쫓는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닌가.
♠ 태수가 북을 치게 하여 퇴영시(退營時)임을 알린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닌가.
♠ 누군가가 날리고 있던 연줄이 끊어져서 연이 날아간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닌가.
♠ 벌판에 불이 붙고 있다. 그것을 보고 있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닌가.
♠ 빚진 돈을 모두 갚아버린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닌가.
♠ ꡒ규염객전(?髥客傳)ꡓ원주1)을 읽는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닌가. ․․․실로 이 세상은 우리의 관능에 의해서만 즐길 수 있도록 우리에게 차려진 인생의 향연이며, 이와 같은 관능적인 기쁨을 인정할 수 있는 교양을 지니고 있어야만 비로소 솔직하게 그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재언을 요하지 않는 일이다. 자기 자신의 관능과 함께 흔들리고 있는 이 호화스러운 현세에 대하여 우리들이 자진해서 눈을 감는 것은 유심론자가 우리들을 아주 관능 공포자로 만들어버리 탓이 아닐까. 좀더 높은 견지에서 철학이 우리들이 육체라고 부르고 있는 이 섬세한 감수 기관에 대한 믿음을 재건해주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우선 육체를 멸시하는 사상을 몰아내고, 이어서 관능 공포를 없애지 않으면 안 된다.․․․
* 규염객ꡑ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영웅의 이야기로서, 자기 집을 도망쳐 나온 두 애인을 구하여 멀리 떨어진 도시에다가 가정을 갖게 한 후 행방을 감춘 인물이라고 전해진다. - 임어당(林語堂) 의 <생활의 발견> 중에서 |
|
'閼雲曲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원의 <담쟁이 덩굴> (0) | 2010.11.04 |
---|---|
매미 (0) | 2010.06.27 |
이재무의 <소래 포구에 와서> (0) | 2010.01.09 |
기형도의 <진눈깨비> (0) | 2010.01.09 |
문정희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 (0) | 2010.0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