有脚陽春-나의 사랑

삶의 사연 - 이별과 아름다움

nongbu84 2010. 8. 28. 13:17

떠날 때를 알고 떠나가는 사람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1.계집아이 하나가 내 청춘을 건너 세월 속으로 떠났습니다. 이슬비 젖은 새벽 의자에 앉아 기다리던 정분을 멀리 한채 세월의 강을 건넜습니다. 분홍빛 사연과 봉숭아 물든 연애만을 남긴 채 떠났습니다. 책 속에 연정을 적은 편지를 끼워 보냈던 아이였습니다. 그 시절 편지를 가슴에 웅크려 안고 쪼르르 달려 가던 계집아이를 보며 온 몸이 떨렸습니다. 펄쩍 뛰어올랐습니다. 하지만 계집아이는 멀리 세월의 아득함으로 떠났습니다. 그 아이가 떠나던 날 낙엽이 뒹글었고 흙먼지가 일었습니다. 눈 속에는 흙먼지가 한 움큼 들어갔습니다. 그 아이를 보내며 내 청춘은 몸살을 앓았습니다. 신열이 났고 오한이 들었던 젊은 시절이었습니다.

 

  

계집아이도 아파하면서 떠났습니다. 그 아이는 속까지 붉은 감빛 노을 속으로 걸어갔습니다. 그 아이는 걸어가며 눈 물 한 줌 그리움 한 줌 뿌렸습니다. 그 아이의 등뒤로 슬픈 사연 한 장 가슴아린 추억 한 장 뚝뚝 낙엽되어 떨어졌습니다. 그 아이의 떠나는 뒷모습조차 슬프게 아름다웠습니다. 내안에는 슬픔이 자랐습니다. 그 아이는 떠나면서 아픈 가슴을 가진 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너와 나>의 마음속으로 아픔의 물줄기가 흘러갈 수 있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어떻게 아픔의 물길이 열릴 수 있는가를 배웠습니다. 

  

 

슬픔을 보면 가슴이 저려옵니다. 꺼억 꺼억 울음소리가 마음의 바닥에서 들려옵니다. 가까운 곳에서 찾아온 슬픔이 먼 세월 속으로 가면 그리움이 됩니다. 오랜 그리움은 사랑이 됩니다. 그 아이의 떠나는 뒷모습을 보면서 또 다른 사람의 아픔으로 찾아가는 길을 발견하였습니다. 내 아픔의 물줄기가 흐르는 물길을 겨우 찾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좀 일찍 떠나면서 내게 너무 늦게 사랑을 알려주었습니다. 한 장의 흑백사진과 아득한 현기증으로 그 아이를 기억할 뿐입니다. 이제는 떠난 그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떠난 자리의 아픔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아버지가 먼 시간의 무덤속으로 저벅저벅 걸어갔습니다. 여름철 소나기처럼 굵은 바람줄기에 고춧대공 부러질까 지지목을 깎던 아버지의 낫질소리가 아직도 들려옵니다. 두엄 냄새 그득한 손으로 손주녀석을 안던 그이의 냄새가 아이의 옷에 배어있습니다. 고추밭에서 그이의 품에 안겨 사진을 찍었던 아이는 책가방을 둘러매고 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이는 떠났습니다. 저녁 늦은 시간 얼콰한 술로 정겹게 부르던 아버지의 노래곡조는 산기슭을 타고 먼 이국땅으로 사라졌습니다. 그 대신 전봇대의 전단지가 바람에 윙윙거리는 소리만이 들립니다. 그이는 몇 장의 사진과 몇 잔의 술로 남았습니다. 나도 떠나면 또 몇 장의 사진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이가 떠난 자리에 움푹 패인 슬픔의 자욱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아주 오랫동안 그 흔적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이를 보낸 후로 내 턱밑 수염은 굵어졌고 시계바늘은 아주 빠른 속도로 회전하였습니다. 그이가 떠난 이후로 새벽 공기를 마시며 걷는 일이 많아졌으며 밤늦은 귀가로 발걸음이 무거워졌습니다. 그이가 떠난 자리마다 학급봉사일처럼 분주한 일상과 학기말 성적처리처럼 깔끔한 죽음이 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이제는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내 자신의 걸음소리가 들려옵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바라보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면서 하루를 살아가는 소중함을 배우고 있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는 하루하루의 순간이 너무도 소중합니다. 그이는 떠났지만 나는 살아있습니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순간순간을 사는 일은 무척 벅찬 일입니다.

 

 

3.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습니다. 떠날 때를 알고 가진것을 비울 수 있는 사람 또한 아름답습니다. 내려올 때를 알고 내려오는 사람의 발걸음은 가볍습니다. 비울때를 알고 비우는 사람의 주머니에는 한 참 동안의 사랑이 묻어나옵니다. 속을 뒤집어 보면 아프지 않은 것들이 없습니다. 속을 들여다보면 슬프지 않은 것들이 없습니다. 뒤집어 놓은 버선 발 처럼 엉겨붙은 바늘 땀과 발냄새가 그득 묻어 납니다.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 뒤로 저녁 노을 묻어 납니다.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사람의 얼굴 가득 정겨운 추억과 따뜻한 가슴이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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