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가의 노을, 그 그리운 뒷태
지난 여름 강에 다녀왔습니다. 흘러간 것들의 아쉬움을 달래기보다는 강물처럼 흘러가고 싶었습니다. 이미 걸어온 길들은 흘러갔고 돌이킬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어디로 흘러가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목적지를 정해 한 길만을 고집하며 흘러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물처럼 바위가 앞을 막으면 돌아가고 때로는 바위조차 부수어 버리고 흘러가고 싶었습니다.
강을 따라 흘러가면서 저무는 저녁의 노을을 보았습니다. 흘러가면서 피었다가 지는 꽃들의 마른 모습을 보았습니다. 물안개가 솜사탕처럼 피어오르는 계곡의 다리 벌린 자태와 숨 가쁘게 산중턱을 차고 오르는 안개의 뒷발질도 보았습니다. 모든 것은 흘러가면서 저물고, 지고 마르며, 차고 오르고 있었습니다. 온통 흔들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물어서 흔들리는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흔들리면서 저무는 모습이었습니다.
몸을 뒤척이는 저녁에 눈 맑은 연어를 닮은 사람의 무릎을 베고 누웠습니다. 참 눈이 맑고 가슴이 서늘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월 흘러가면서 흔들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고운 무릎을 베고 누워 물안개 피어오르는 강의 어둑한 풍경을 볼 수 있겠습니까? 차마 흔들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땅거미가 가부좌를 틀고 내려앉은 강물위에 내 마음의 복채를 두둑하게 줄 수 있겠습니까? 차마 흘러들어 걷지 않았다면 언제 이 무릎을 베고 누워 강 물소리를 듣고 산굽이를 헤아려 볼 수 있었겠습니까?”
헤아릴 수 없는 산굽이 산굽이가 이어져 있고 넘실대며 절벽을 치고 오르는 물안개가 피어올랐습니다. 한 사람의 무릎이 또 한 사람의 생애를 떠받치고 그 사람의 생애는 온 강과 산을 떠받치며 쉬었습니다. 한 사람의 무릎은 우주를 떠받치는 받침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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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에 오기 전까지 너무 오랫동안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 아래에 서 있었나 봅니다. 그 자리에서 흘러가지 않고 서 있었습니다. 그 동안 계절은 바뀌었습니다. 눈이 내리고 낙엽이 지고 싹트는 일이 몇 번씩 반복되었습니다.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으면 사람이 오고 세상이 바뀔 줄 알았습니다. 기다림은 어머니가 장을 보러 치맛자락을 끌며 산모퉁이를 에돌아 설 때 배웠습니다. 풋사과 같은 계집애와 헤어진 후 더욱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러면서 자주 흘러온 길을 뒤돌아보았고 걸어갈 길을 찾아 지도를 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마음은 자꾸 조급해졌습니다. 어디론가 가야할 것 같았습니다.
잠시 동안 지도에 나와 있는 길을 믿고 걸었습니다. 하지만 지도에 길은 있었지만 사람이 다니는 길은 없었습니다. 사람이 다녔던 강가의 길은 이미 장마에 떠내려 간지 오래되었습니다. 잠시 방향을 찾았습니다. 지도에서 길을 물어 볼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수도가 있는 집을 들렀습니다. 폐교가 된 학교의 뒷집, 코흘리개 아이들이 조약돌을 건네주려 숨어들던 담벼락조차 허물어가는 집, 그 집에서 물을 얻어먹었습니다. 그 집을 나와 마을을 통과 할 무렵 고추밭에서 고추를 따던 아주머니께서 외쳤습니다.
“어디들 가는 거래요? 어디로 가려고 그리 가는 거래요? 거기로 가면 길이 막혔대요. 장마로 다 끊겼대요. 거기는 사람 다닐 길이 아니래요”
......‘정말 나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금은보화와 부귀영화를 찾아 빨리 달려가는 것은 아닐까? 낭떠러지가 있는 것도 모른 채 무작정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은 아닐까? 지금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 내가 걸은 자리에 가득 고였던 눈물을 보면서 너무 빨리 도망친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신었던 신발 속에서 구멍 난 양말을 감추기 위해 발가락이 쥐가 나도록 오므렸던 아픔이 내 옆의 사람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까? 배가 고파 라면집 앞에 서서 라면 냄새로 허기를 채우면서도 달려가 시와 혁명을 이야기 하던 첫사랑의 사람이 ‘너’였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로 흘러가느냐며 길을 묻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냐고, 미래에는 얼마만큼의 성공과 부와 명예가 보장 되냐고, 이 길을 가다 보면 금은보화 가득한 마을에 도달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점쟁이들>은 길을 묻는 ‘그대들’을 찾아 적극적인 홍보에 나서 열변을 토하고 있습니다. 정말 점쟁이를 찾아가면 흘러가는 길을 알려 줄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강가의 산 중턱에 고즈넉하게 앉은 절, 그 입구에 <길을 묻는 그대에게>라는 점집이 있었습니다. <길을 묻는 그대에게>라는 간판이 오랜 세월 비바람에 젖고 햇볕에 마르는 세월을 반복하면서 바짝 마른 몸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 간판은 흘러 흘러 바짝 말라가며 저물고 있었습니다. 흘러가면서 바짝 마르는 간판의 모습을 보며 흘러가는 방향을 어렴풋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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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 왼쪽 어깨에 깎아지른 절벽을 둘러매고 흘렀습니다. 그 절벽을 붙들고 소나무가 매달려 있습니다. 강물은 흘러가는 세월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뒤척이며 절벽을 들었다 내렸다 하면서 어깨춤을 추었습니다. 어설픈 제방의 둑길은 강의 춤사위에 무너져 뭉개졌습니다.
강가의 산모퉁이를 에돌아 가다보면 맞은 편 산자락에 빨간 라면 봉지 같은 집들이 널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길과 맞은 편 마을을 이어주는 밧줄이 하나 매어져 있습니다. 강을 사이에 두어 갈 수 없는 길을 밧줄을 매어 배를 끌면서 서로 찾아갔습니다.
저 밧줄마저 끊어져 없어 졌다면........
넘실넘실 춤추는 강물이지만 인연을 끊는 잔혹한 춤사위입니다. 강의 넘실댐은 머리를 깎고 출가하던 날 떨어지는 머리카락처럼 춤추는 운율이지만 남은 자의 질긴 인연과 그리움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다행스럽게 밧줄은 강을 건너 바위를 꼭 붙들고 있었습니다.
“건너 마을 사람을 만나러 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달밤을 보냈으며, 건너 마을로 남 몰래 찾아들던 달밤이 얼마나 많았을까? 한번 찾아간 사람의 품을 떠나 되돌아가고 싶지 않던 발길을 돌리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강물에 뿌렸을까? 주먹밥처럼 꽁꽁 언 가슴을 강물에 던지며 눈가에는 얼마나 살얼음이 서걱서걱 얼었을까?”
사람에게 가기 위해 강물줄기를 따라 흘러 흘러 세월을 걸어왔지만 아직 사람에게 갈 수 있는 ‘줄 배’ 한 척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언제쯤 사람에게 갈 수 있는 ‘줄 배’를 타고 줄을 당기며 휘영청 달 밝은 밤을 건널 수 있을까? 밤새 건너 날이 밝더라도 손에 물집이 잡히고 손바닥이 까져도 당길 수 있는 줄만 있다면 낡은 뗏목으로 왜 줄 배하나 만들지 못할까?’
강줄기를 따라 험산준령을 넘기 전 집 한 채가 등불처럼 매달려 있습니다. 그 집 평상에 앉아 쉬고 있는데, 주인 할머니는 장마에 젖은 집안 살림살이를 햇빛에 말렸습니다. 장판이며 부엌 살림살이가 눅눅하게 젖어 있었습니다. 흘러가는 우리 삶도 땀에 젖은 살림살이처럼 여기저기 젖었습니다. 산중턱에 매달린 그 집에서 물을 얻어먹고 일어서려는데 할머니는
“ 맛있는 거 있으면 나누고 가는 거 아이래, 쉬었다가 그냥 가는 사람들이 어디 있나? 마당 그늘 값은 나누어야 하는 거래. 뭔 사람들이 그래?”
마당을 나누어 받았으면 우리도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하는데 그렇질 못했습니다. 부끄러워 숨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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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을 흘러 넘어가는데 길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 길이가 어느 정도이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며 어느 곳으로 방향을 잡아야 하는지 모릅니다. 장마에 풀이 우거져 사람 다니던 길도 사라졌습니다. 겨우 길의 흔적을 찾아 길을 만들며 산길을 넘었습니다. 산을 넘고 나니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지칠수록 몸과 마음에 버겁고 무거운 것들은 모두 버렸습니다. 그리운 사람하나만 가슴에 오롯하게 남았습니다. 흘러 넘는 이 힘든 길을 ‘그리운 사람’ 하나 만나려 걸은 것 같습니다.
강가에서
이른 잠을 깨 서걱서걱 산굽이를 넘는
발걸음을 배웁니다.
강물소리를 들으면서
포도송이 같은 눈물을 떨구며
주먹밥처럼 언 가슴을 녹입니다.
강처럼 흘러갑니다.
밧줄을 매어 ‘줄 배’를 끌면서 건너 마을에 사는 한 사람에게 갑니다.
강처럼 흐르는 세월 속
나는 단풍나무처럼
얼굴 빨갛게 취기가 오른 가을이 됩니다.
강가에 다녀 온 뒤
산은 내 머리맡에 앉았다 쉬어가고
마음에 모과 향 가득한 가을을 남기며
강처럼 그리운 사람 하나 두고 갑니다.
강가를 다녀온 후 강은 내 마음 속에 다 채우지 못한 소주잔의 여백처럼 곱게 남았습니다. 나는 얼굴 벌겋게 달아오른 단풍처럼 바람에 흔들리며 강을 생각합니다. 강에 다녀온 동안 골목길에 등 굽은 봉숭아꽃이 줄지어 피었습니다.
여름 밤 청어 떼처럼 몰려다니던 골목길, 그곳에서 강처럼 흐르는 사람과 마주쳤습니다. 그 눈빛 한번에 단풍이 물들고 빨간 우체통은 편지를 주워 담았습니다. 손톱의 하얀 낮달도 봉숭아물들인 것처럼 붉어졌습니다. 골목길 어귀의 서점에 들러 시집을 고르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서점 문을 여닫을 때마다 솔깃 솔깃한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감나무에 몇 개 남은 감처럼 가로등 불빛 아래 바람에 흔들리며 걷고 있습니다. 골목길에 낙엽이 떨어져 수북하게 쌓여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발자국 소리를 감추고 있습니다. 그 길로 젊은 느티나무를 오르던 세월이 따라가고 마른버짐 같은 생활이 따라가고 있습니다. 나는 소주잔의 여백이 되고 얼굴 빨간 단풍이 되어 가을을 걷고 있습니다.
나는 흘러가면서 얼굴 빨간 단풍 같은 취기에 흔들리는 가을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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