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에 머물다 가는 슬픈 것들
그의 할아버지는 살구나무 시큼하게 서있는 흙집에 살던 문풍지라는 장님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소리만 들었습니다. 방안 등잔불빛만을 보듬고 살았습니다. 화롯불의 온기가 사라질까봐 조바심을 냈습니다. 아랫목 이불 속에 둔 밥그릇이 식을까봐 찬바람 불면 소리 내어 울기도 하였습니다. 뱀 허물 같은 나무껍질을 엮어 옷을 만들어 입은 탓인지 목도리 같은 두터운 따뜻함은 품지 못했습니다. 세상소문에 귀 막고 살지 못하고 바람 따라 전해오는 세상 소식을 자주 들었습니다.
그는 풍문을 따라 세상으로 떠나고 싶었지만 떠날 수 없었습니다. 탯줄처럼 감긴 문살을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문살에 붙어 풍문만 듣던 서러움은 물뭍은 손 쩍쩍 달라붙는 문고리의 한기로 달랬습니다. 그는 찬 바람 하나 막으며 평생을 살았습니다. 문살을 부여잡고 제 몸을 이불처럼 펼치고 한파를 막았습니다. 다만 손가락만한 구멍하나를 허락하였습니다. 그 구멍으로 세상을 보며 살았습니다. 그 구멍 사이로 사람들이 지나갔으며 개들은 짖어대고 눈발이 흩날리고 찬 바람이 눈 속으로 새어들었습니다.
그는 할아버지의 돌아가신 후 버스를 타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밤새 진눈깨비가 내려 길에는 덕지덕지 눈얼음이 얼어붙었고 바람은 눈물나도록 차갑게 불었습니다. 버스 안은 사람들의 체온으로 따뜻했습니다. 그는 버스 안에서 이별의 몸살을 앓으면서 사람들의 더운 입김과 데워진 몸을 보면서 육감적인 호감을 느꼈습니다. 온 몸에 성에가 가득 찼습니다.
그는 몸에 험한 세상에 살아남기 위한 보호색 같은 문신을 새겼습니다. 세상에 위협을 주면서 자신을 방어하고 싶었습니다. 움켜진 주먹의 뒤끝으로 찍은 사람들의 발자국 모양이 새겼지만 귀여웠습니다. 어릴 적 동무의 이름을 새기기도 하였습니다. 할아버지의 가슴을 뚫은 듯한 구멍모양을 새겨보기도 하고 지웠습니다. 문신을 새기며 겪는 아픔은 사람들의 더운 입김으로 다독였습니다. 더운 입김에서는 한숨이 들리고 소주 냄새가 진동하고 담배냄새가 나기도 하였습니다. 마음에 드는 문신이 없었습니다. 단 한 가지 이마를 처박고 문지르는 삶의 무늬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찬란한 서늘함을 느낄 수 있는 문양이었습니다. 아름답고 슬픈 이마의 열기로 만든, 머리 쿵쿵 찍어댄 당돌함으로 찍은 삶의 무늬를 가득가득 새겼습니다. 그 무늬를 새긴 몇 몇의 이마 위에 쩡 울리는 삶의 소리와 서늘한 슬픔을 주었습니다.
버스는 오랫동안 달려 어느 기차역 근처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가 버스에서 내린 시각은 자정을 훨씬 넘긴 새벽이었습니다. 열차는 이미 떠났는지 대합실에는 간이의자에 누워 자는 사람들만이 몇 있었습니다. 사과 몇 개와 떡을 싼 보자기가 의자에 있었습니다. 아픔과 슬픔을 등에 짊어진 채 졸고 있는 세월이 흐르고, 눈물 몇 가닥이 국수처럼 묶여져 한 쪽 구석에 정리된 듯 쌓여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였습니다. 어둠 속으로 길게 누운 철로로 눈을 두면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 듯 온 몸이 빨려 들어갔습니다. 온 몸의 피가 빨려 들어가고 창백한 그의 얼굴만이 남았습니다. 그의 얼굴에 타들어가고 있는 화톳불의 잔흔이 얼비쳤고, 눈발이 하얗게 쌓인 모습이 비쳤습니다. 화톳불은 주인을 잃은 채 타닥타닥 콩깍지 튀듯 땅바닥에 자맥을 쳐대며 한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쓴 담배만 피웠습니다. 그리운 할아버지의 품도 생각났습니다. 동무들의 이름을 불러보기도 합니다. 침묵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어둠만을 남겼습니다.
그렇게 그는 고향을 떠나 도시에 이사와 벽돌 건물에서 살고 있습니다. 안과 밖의 경계를 만들며 담을 만들며 따뜻한 기운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에게 그리움을 만든 사람들이 찾아와 자주 이야기합니다. 들릴 듯 말 듯 독백에 가까운 소리를 읊조립니다. 그는 거울처럼 비친 풍경을 다시 보여줍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그 곁에 사람들이 자주 서성거렸습니다.
그는 유리창입니다. 그의 몸에 슬픈 것들이 어른거리고 얼비칩니다. 누군가 더운 입김을 불어 성에를 만듭니다. 성에꽃들이 어린 아기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듯 피었다가 사라집니다. 입김으로 유리창을 흐리게 만드니 새까만 밤이 밀려옵니다. 새까만 밤으로 불빛이 다가오고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립니다.
그는 투명한 유리창입니다. 그를 투영하여 많은 것들이 그냥 통과하여 갔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들은 사람 몇과 추억 몇 가지뿐입니다. 그에게 남은 것들은 밤에 자주 찾아옵니다. 그는 그리운 사람 하나 꼭 찾아옵니다.
.......아침에 출근하여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내 어깨에 기대어 머리카락 두 세 개씩 남기고, 말할 때 “아니, 형!!!!!!!”을 버릇처럼 말하면서 “그 아픔에 한 번 전화 걸어 봤어. 내가 대신 아파줄까”하던 그리운 사람. 창가에 앉아 네온사온 불빛에 어른거린 노을을 얼굴에 담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기도 하고 눈물도 훌쩍이던 그리운 사람. 내 표정만으로도 슬픔을 알아버리고, 밤 10시 이전에 꼭 집에 들어가야 하며, 걸을 때는 뒷 꿈치를 약간 들어 걷느라 어깨가 출렁이고, 기분 좋으면 어깨를 툭툭 치며 내 손에 온기를 전해주던 그리운 사람. 치마를 입고 싶어 하지만 바지를 자주 입어 긴 다리를 뽐내던 그리운 사람. 충청도 사투리로 “그려”하며 내 이야기를 귀담아 주고, 사람의 이름을 자주 불러주고 함께 퇴근하는 길에서 화나면 종종걸음으로 고개 숙이고 달아나던 그리운 사람. 지금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 멀리 떠나간 그리운 사람. 추억으로 남은 그리운 사람........그래서 슬픈 사람의 얼굴이 머물다 갑니다.
나도 그 곁에 추억처럼 그리운 사람처럼 서는 날들이 많아졌습니다. 한 번은 늦가을 비가 오는 오후였습니다. 창 밖에는 바람이 불고 낙엽은 흩날리고 비는 흩뿌렸습니다. 그 곁에 섭니다. 창에 비친 내 얼굴이 미워집니다. 욕심에 겨운 세월이 얼굴에 새겨졌고, 한 사람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눈빛에 아파옵니다. 돌아섭니다. 하지만 그리운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다시 돌아서 창가에 섭니다. 창에 비친 내 얼굴 미우면 돌아서면 그만이지만, 그리운 얼굴이 창에 낮달처럼 떠오르면 마음 어지럽습니다. 눈을 감아도 보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어 유리창이 자꾸 얼룩집니다.
유리창에 성에가 끼어 밖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자꾸 내가 보입니다. 내 얼굴이 보이고 아픈 추억이 보이고 그리운 얼굴이 보입니다. 아픔이 배어나는 추억이든 행복함을 주는 추억이든 추억은 그 자체로서 존중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도 그 곁에 섰습니다. 창 밖으로 감나무 한 그루 서 있습니다. 까치밥 몇 개 덜렁덜렁 바람에 흔들리고 겨울나무로 무릎 꿇고 손들고 있습니다. 찬 바람이 불고 흩날리던 낙엽조차 얼어붙었습니다. 창 밖을 보면 자꾸 내가 보입니다. 내 말이 들리고 내가 걷던 길이 보이고 그림자가 보입니다. 떠날 때는 떠나고 머물고 싶을 때는 머물고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며 걷는 걸음을 배웠지만 자꾸 발걸음이 엉퀴며 뒤뚱거립니다. 추억은 늘 등 뒤에 남으며 등 뒤로 하늘이 있지만 노을 진 저녁이 자꾸 보입니다.
한참을 서 있었더니 밤이 찾아옵니다. 창이 얼어붙은 밤은 아무것도 비추지 않습니다. 불빛도 그림자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비추지 않고 소리마저 얼어붙었습니다. 그리운 사람의 이름을 부르지만 가슴으로 되돌아가 파묻힙니다. 불빛도 그림자도 잃고 그리운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일조차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리움은 등 뒤에 가장 큰 그림자로 섰습니다. 그리운 사람을 가슴에 품어 안았습니다. 그리운 사람의 심장하나가 내 심장에 달라붙어 박동을 칩니다. 그리운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창가에 맴돌다 가면 그리운 사람이 찾아옵니다.
'有脚陽春-나의 사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하는 사람 (0) | 2014.10.08 |
---|---|
벽과 담쟁이 넝쿨 (0) | 2013.08.28 |
길, 동행, 그리고 사랑 (0) | 2013.08.22 |
강가의 노을, 그 그리운 뒷태 (0) | 2013.08.21 |
어떤 연애 : 밀실에서 광장으로 (0) | 2013.08.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