閼雲曲 -시

김수영의 < 그 방을 생각하며>

nongbu84 2017. 4. 9. 12:10

그 방을 생각하며     - 김수영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사지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 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 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잔재 대신에

다시 쓰디쓴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풍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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