閼雲曲 -시

어느 여름 날, 빨랫줄을 당겨 묶다

nongbu84 2018. 6. 19. 16:51


어느 여름 날, 빨랫줄을 당겨 묶다

 

허공의 배꼽에서 튀어나온 탯줄 같은 빨랫줄이

양쪽 모퉁이에 세워진 기둥의 귀를 붙들고 있다

 

장롱 속 눅눅한 옷가지를 빨아 옥상에 오르면

바닥까지 늘어지는 빨랫줄 같은 날들이 찾아와,

 

가령 오래전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라면 부수어 먹으며

저녁 만찬을 물고 지나가는 개미의 행렬을 바라보던,

라면 끓여 받침대로 놓았던 상장에 국물이 흘러

칼칼한 무엇이 목에 걸리고 면발 같은 눈물이 쏟아지던,

하여 빨래집게로 자꾸 왼손 검지손톱을 찝던 오른 손의 촉각 같은,

 

그런 저녁의 빈방에 내가 문득 앉아 있어

축축하게 젖은 빨래를 힘주어 탁탁 털어 너는 것이다

 

쨍쨍한 햇볕 아래 오래되고 익숙한 바람까지 불면

가슴에 새겨진 엉컹퀴 꽃은  흔들리며 말라

물컹한 과거는 마른 무늬가 되지만

  

삶의 등짝에 찌든 기름 얼룩은 저녁까지 마르지 않아

다시 빨랫줄을 팽팽하게 당겨 묶어

밤새 산비탈 참나무의 푸른 잎처럼 매달아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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