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
아버지는 평생 안주머니에 밤색 지갑을 넣고 다녔다
누군가의 生을 빳빳하게 말리고 꿰매고 다린 지갑은 처음 태어난 핏덩이 같은 출생지를 등록한 증서하나를 품고 덥수룩한 머리에 앙다문 입술의 가난과 새벽마다 어머니와 두런거리던 안방의 걱정과 막내아들 서울로 떠나보내던 길의 끝자락을 칸칸에 품어 배를 자주 곯았는데, 허한 빈속의 염증 때문에 속이 쓰렸는데, 소를 팔고 온 장날만큼은 배가 두둑하게 불러 장에서 국밥 한 그릇 사먹고 동태 두 마리 사들고 집에 왔어도 밤늦게까지 배가 꺼지지 않았다
한번은 아버지 지갑이 수렁에 빠져 흙투성이가 되었는데 어미 소가 죽은 새끼를 낳아 비료 값도 안 되는 한숨을 쉬며 술에 잔뜩 취한 날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사진 위에 포개어 얹은 지갑 속의 가족사진을 보며 뜨겁게 울었다 그날 지갑은 새끼줄 같은 눈물 흘리며 온몸 통째로 젖어 한쪽의 어깨가 허물어졌다
여덟아홉 살쯤의 어느 날 나는 아버지 지갑에 손을 댔다가 회초리를 맞았다 쌀을 팔고 온 날 오백 원짜리 지폐를 몰래 꺼내 동네 아이들한테 라면 땅을 사주었는데 다음 날 새벽 아버지는 이불 속에 누워있는 나를 아스라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모른 체 하고 더 누워 잤는데,
아버지, 그 날 제 주머니에 몰래 넣어 두었던 그 편지를 잊을 수가 없지요 가난한, 이, 애비가, 다 잘못이다, 그날 아버지의 지갑에서 떨어진 날 비늘 같은 生이 내 안주머니로 들어 왔지요
아버지의 지갑은 벚꽃 눈발처럼 날리던 4월의 봄, 입을 꾹 다물고 노구한 뼈만 앙상하게 드러난 채 눈을 감고 生을 마쳤다 나는 지갑을 꺼내 황천 가는 구만리 길을 가시다가 막걸리 한 사발 사 드시라고 굳은 손에 노잣돈을 꼬옥 쥐어드렸다
자 보세요 아버지, 이 지갑은 날것인 생을 꿰매고 말린 아버지가 남긴 밤색 지갑이지요. 제 안주머니에서 빠져 나올 줄을 모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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