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창
겨울, 찬 유리창에 얼굴을 댔을 때 비로소 나의 눈빛을 보았다
사무실로 창백한 한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벽에 걸린 사진 속의 누군가가 전신 마취를 하고 심장을 도려내는 수술을 하였다는 소식, 무균실에서 몸부림을 친 지 한 달이 넘었다 한다 유리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의 안부가 죽음의 가난한 형편
공포를 음미하는 전통에서 발달한 빌딩, 유리창이 찬란하게 빛났다 빌딩의 숲에서 자유로운 비행飛行은 사랑처럼 치명적이다 수평의 직선으로 날던 새가 수직으로 상승한 빌딩의 유리창에 부딪혀 날개를 투명하게 꺾였다
유리창 밖의 가로수가 소리 없이 흔들렸다 몸짓만 요란했다 음을 소거한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꿈틀대는 원시의 욕망이 갇히면 탄성 없는 자막이 된다 그래서 죽음 또한 슬프지 않다
거미가 빌딩의 정수리에 밧줄을 묶고 수직으로 하강했다 유리창을 닦는 인부처럼, 갈등의 표본이 대롱대롱 매달려 박제된 내 눈과 마주쳤다 거미의 눈빛 속에 내가 들어 있다
깊은 어둠의 숲에서 거미가 밧줄을 뽑아내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친 밧줄에 결박당했다 그의 이름을 상기하는 건 어렵지 않다 유리창에 비친 거미 한 마리
오래 전 꿈속에 그의 그물을 허락하였다 이내 공포가 찾아왔다 공포로 성장한 무리들이 표본실에 갇혀 과거를 생각하며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
결정적 화살은 반목의 과녁에 박혀 부러진다
겨울, 찬 유리창에 얼굴을 댔을 때 비로소 나의 숨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