閼雲曲 -시

백석의 <국수>

nongbu84 2009. 9. 4. 10:48

'국수’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 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 밭에서

하로밤 뽀오얀 흰 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의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텀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베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베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기사발에 그득히 사리워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러났다는 먼 녯적 큰 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아바지기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끊는 아루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김치가재미:북쪽 지역의 김치를 넣어 두는 창고, 헛간

*양지귀 : 햇살 바른 가장자리

*은댕기 : 가장자리

*예대가리밭 : 산의 맨 꼭대기에 있는 오래된 비탈밭

*산멍에 : 이무기의 평안도 말

*큰마니 : 할머니의 평안도 말

*집등색이 : 짚등석, 짚이나 칡덩굴로 만든 자리

*자채기 : 재채기

*희수무레하고 : 희끄무레하고

*삿방 : 삿(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을 깐 방

*아르궅 : 아랫목

*고담(枯淡):(글, 그림, 인품 따위가) 속되지 아니하고 아취가 있음


<1935년 1월 20일, 첫 시집 「사슴」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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