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의 가을로 남고 싶다.
단 한 번의 가을로 남고 싶습니다. 수없이 많은 단풍이 들고 낙엽이 떨어지는 세월 속에서 단 한번은, 그래, 단 한번 밖에 없는 가을로 남고 싶습니다. 목 메인 날들의 가라앉은 음성으로 가을바람이 불어도 가을로, 그래, 가을날의 풍경으로 남고 싶습니다.
1. 가을날의 풍경
단풍잎은 빨갛고 은행잎은 노랗습니다. 햇살을 받으면 알록달록 몸빼 바지 무늬를 자랑하며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바람이 불고 낙엽이 흩날리는 저녁시간, 옷깃을 여민 사내들이 술집 문을 열고 들어섭니다. 다시는 찾지 않으리라 외면했던 첫사랑과 함께 막걸리 잔을 기울입니다.
아이들은 낙엽처럼 떼구르르 웃습니다. 뭉게뭉게 흰 구름 뭉칠 때 파란 물감이 하늘 가득 번져 갑니다. 풀숲을 떠돌던 잠자리 떼 하늘 가득 날아오릅니다. 아이들은 웃자란 쑥 대공에 앉은 잠자리를 잡습니다. 검지 손가락 빙글빙글 돌리며 파란 하늘까지 마음 가득 잡아둡니다. 아이들의 손끝에서 가을 하늘은 빙글빙글 어지럽게 돌아갑니다. 아이들은 영원히 잃지 않으리라 애써 다짐하며 첫사랑을 꿈꿉니다.
길가에는 여름 내 살찐 코스모스가 피었습니다. 코스모스는 제 몸조차 가누기 힘겨워 뒤뚱뒤뚱 흔들립니다. 가을 햇살은 바짝 야윈 것만을 허락합니다. 가을 햇살에 코스모스는 몸살을 앓는 날들이 많아집니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코스모스는 간디의 바짝 야윈 몸을 닮아 가고, 길가에 서서 파-란 하늘 파-란 바람을 허락할 뿐입니다. 코스모스 길을 걷는 사람들은 서로의 손을 잡습니다. 서로의 손바닥에 고인 땀방울의 간지러움을 느끼며 바짝 야윈 계절을 걷습니다. 코스모스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머리끝에 씨앗뭉치를 쪽찌 틀어갑니다.
빈 공터에서 쑥대는 몸이 메말라 깡마른 체구를 드러냅니다. 서로 어깨동무하며 한 뭉치의 씨앗을 만들어 냅니다. 바람 불면 허리가 꺾이고 고단한 한 생애를 달래듯, 땅에 머리를 누입니다. 땅에 누운 머리맡, 그 곳에 한 뭉치의 반란군이 땅속을 파고듭니다. 그곳에서 쪽찌 틀었던 씨앗을 털어 냅니다. 씨앗은 가을 날 풍경이 만물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2. 가을의 의미 혹은 메마른 것들에 대한 애착
또 한 번의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나뭇잎들의 순연한 탈색이 버짐처럼 번져갑니다. “야위거라. 물기 오른 줄기의 허황을 마르게 하거라. 허황한 망령과 오만한 몽상을 집어 던지거라. 더욱 마르거라.” 가을날의 풍경 속에서 읽어내는 경구입니다. 뚱뚱한, 기름진, 살찐 몸은 여름에 어울리는 모습일 뿐 그 몸으로 가을을 날 수는 없습니다.
곱게 화장한 새색시가 가을 햇볕에 나섰습니다. 분바른 얼굴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습니다. 울긋불긋 화장한 얼굴로는 가을 들녘에 설 수가 없습니다. 바짝 마른 얼굴, 부르튼 손만이 들녘에 서서 떨어진 이삭을 주울 수 있습니다. 가을 들녘은 화장기 없는 얼굴과 꺼칠한 손만을 허락합니다.
울긋불긋 치장한 나무들도 거리에 나섰습니다. 한껏 위장하고, 한껏 폼을 잡고 거리에서 무력시위를 합니다. 하지만 분칠한 얼굴로는 가을 거리의 쓸쓸한 낭만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가을은 더 이상 위장한 나무들의 아름다움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가을을 알지 못했는가를 생각합니다. 메말라 가는 몸으로 머리맡에 씨앗 한 줌 쪽지 틀던 코스모스를 알지 못한 뼈저린 아픔이 다가옵니다. 가을날의 기름진 사치, 그 위장된 처세와 화려한 치장은 씨앗을 만드는 속임수였습니다. 가을날의 화려한 외출과 방황은 꿈을 만드는 위장전술이었습니다. 나도 머리끝에 씨앗하나 쪽찌 틀어 올리는 위장과 허위를 배우고 싶습니다. 나도 메말라 가면서 거리를 좁힐 줄 아는 씨앗뭉치가 되고 싶습니다. 거리를 좁힌, 그래서 촘촘히 발뒤꿈치 들고 서 있는 씨앗들을 머리에 이는 가을을 배우고 싶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 메마른 가을날이 찾아 올 것이고, 더 건조한 거리를 걷게 될 것입니다. 울긋불긋한 치장하는 일도, 노랗고 빨갛게 탈색하는 일도 번거로운 일상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내게도 순연하게 빛바랜 가을이 가까워 옵니다. 멀리 떠났던 친구가 다가오듯, 그렇게 가을이 다가 옵니다. 이제는 떨구어 내고 벗어 던지며 머리끝에 씨앗하나 쪽찌 틀 줄 아는 가을을 배우고 싶습니다.
3. 가을 저녁, 보름달에 대한 그리움
가을 저녁 보름달을 바라봅니다. 눈병으로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달은 저만치 있고 눈꼽 낀 눈에는 토끼가 떡방아를 찧는 모습이 사라지고 이빨 빠진 조각달만 보입니다.
가을 저녁 보름달은 서글픔입니다. 한쪽 귀퉁이를 물어뜯긴 채로 두둥실 흘러갑니다. 헐렁한 바지처럼 일상의 고단한 속내가 숨어있습니다. 정겨움의 시대는 갔습니다. 정겨운 달은 전설 속의 이미지로 전락하고 앙상한 뼈대와 주름 풀린 낮 달로 우주를 헤매고 있습니다.
가을 저녁 보름달은 어머니 얼굴입니다. 열 몇 살의 봉숭아 연정으로 시작한 생애가 이제는 밭두렁처럼 불끈 불끈 솟은 주름살로 져가고 있습니다. 단 한 번의 호미질로 우주를 헤집던 시절에는 그래도 사내 품을 그리워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풀 한 포기라도 뽑고 싶은 소망은 잿 속에 덮혀 있는 불씨처럼 가을 저녁 아궁이 속에 남아 있을 뿐입니다.
가을 저녁 보름달에는 토끼가 떡방아를 찧는다는 전설이 전해져 왔습니다. 하지만 그 전설이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어머니께서 보름달을 보면서 소원을 빌라고 등짝을 두드려 주던 가을 저녁의 풍경도 사라졌습니다. 이미 보름달 뜨는 가을 저녁으로 달려가는 귀성객을 만나기가 힘들어졌습니다. 다만 등짝을 두드려주던 어머니의 손맛만이 매운 여운으로 남아 있습니다.
가을 저녁 어머니의 앙상한 가지 같은 생애를 생각합니다. 어머니께서 뒤집은 버선발의 바늘땀처럼 촘촘히 기우는 바느질을 했듯, 그렇게 촘촘한 그리움을 하나 가슴에 간직합니다. 보름달을 향한 그리움을 간직하며 살았던 한 여인을 그리워합니다.
4. 가을 편지 - 아들에게
아들아, 너는 보름달이 동네 어귀에서 서성대는 모습을 본적이 있을까?
가을 저녁에는 이 빠진 어린 아이 같던 달이 둥근 얼굴 드러내며 마을 골목골목을 돌아다닌단다. 그 모습은 처음으로 분 냄새 풍기며 수줍어하는 계집애 같단다. 밤새 부끄러워 얼굴 발개지고, 발간 얼굴 감추려 손으로 가린단다. 그러다가 닭 홰치는 소리에 놀라 새벽녘 떠난단다.
아들아, 내가 네 무릎을 베고 누워 처마 끝에 달린 보름달을 처음으로 보는구나.
내가 네 무릎을 베개 삼아 보름달을 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단다. 네게는 무릎 위에 한 사람의 생애를 올려놓아도 능히 견뎌낼 만큼 단단하구나. 내 무릎 위에 한 사람의 머리가 누으면 나는 뼈가 아프고 다리가 저려온단다. 내 무릎 위에 한 사람의 생애를 고스란히 놓으면 아픈 뼈마디가 가슴까지 저려 온단다.
아들아, 저 달에는 토끼가 방아를 찧는 전설이 있었단다.
햇 찹쌀을 쪄서 절구통에 엎어 넣는단다. 그리고 절구질을 해대면 늠씬하게 얻어맞은 찹쌀은 찰진 추억을 주었지. 엉겨 붙은 찹쌀은 칼로 베고 콩고물로 몸치장시킨단다. 그리고 이웃집 순이네 어머니 손에 전해주었단다. 햅쌀 떡은 그렇게 밤톨이 이웃집 담을 넘듯, 빠르르르 사립문을 넘어 이웃집으로 갔단다. 가을의 찰진 추억은 보름달에서 토끼가 떡방아를 찧은 전설로 태어났단다.
아들아, 며칠 전 달을 베어 먹은 너를 보았단다.
며칠 전 너는 몸살을 앓으며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몸을 뒤척였었지. 바로 그 날이 네가 달을 삼키고 배탈이 난 날이었단다. 그때부터 네 마음에는 보름달에서 떡방아를 찧는 토끼가 살기 시작했단다. 네 마음에 찰진 햅쌀의 풍요가 생겼고, 이웃의 사립문을 밀고 들어서는 발길이 생겼단다. 네게도 보름달의 전설이 전해졌고, 가을저녁의 신화가 생겼단다.
아들아, 저 달동네 어느 집에도 너처럼 보름달을 삼킨 아이가 살고 있단다.
그 집 창문에서는 보름달 동화를 읽는 소리가 매일 저녁 들린단다. 그 집 앞에서 길 가던 행인은 걸음을 멈춘단다. 거리를 헤매며 골목골목을 휘돌아 방황하는 바람도 걸음을 멈춘단다. 그 집 문고리를 휘어잡아 방문을 열어보려 애쓴단다. 밤에서 새벽까지 내달리던 보름달도 그 집 시큼한 살구나무에 잠시 쉬었다가 간단다.
아들아, 네가 사는 마을은 참 아름답구나.
네 마음은 보름달처럼 넉넉한 품으로 닮아가고 있단다. 네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는 보름달의 동화를 읽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린단다. 꼭 저녁 무렵 듣는 개구리 합창소리 같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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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내가 사는 마을에는 보름달이 뜨는 대신 산동네의 휭한 바람이 자주 들락인단다.
내 마음에는 보름달의 전설 대신 산 1번지의 달동네가 있고, 바람 불면 날아가는 지붕을 동여맨 밧줄이 있고, 전봇대에 붙은 구인광고지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단다.
나는, 풋과일 먹어 배앓이 하던 어린 시절을 떠났단다.
나는 다만,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달에게 소원을 빌던 유년의 추억만이 남았단다.
나는, 너를 통해 보름달을 베어 먹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이란다.
나는 다만, 보름달을 삼켜 배탈 난 네 배를 쓸어주는 가을저녁이 되고 싶단다.
나는 다만, 동네 입구에서 서성거리는 보름달이 뜨는 가을저녁을 걷고 싶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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