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과 담쟁이넝쿨
너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을 거야.
내 가슴에 손가락 퍽퍽 찔러가며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을 거야.
스며드는 눈길로 그렇게 잔정을 뻗더니
그만 뺄 수 없는 손길이 되고
지금은 내게 상처로 남은 거야.
처음에 너는 그냥 내 곁에 서 있던 담쟁이 싹이었지.
처음에 나는 그냥 네 옆에 서 있던 황토빛 벽이었지.
그때 너는 연한 잎사귀를 닮은 계집아이였고
그때 나는 소 혓바닥처럼 불쑥 내미는 해를 가슴에 담아 두던 풋 사내였지.
이 세상 누구도 알지 못했을 거야.
소문에 귀 밝은 바람도 알지 못했을 거야.
네가 내 가슴에 잔뿌리를 질러 넣는 담쟁이 넝쿨이 되고
내가 네 뿌리를 감싸 안는 벽이 될 줄............
너는 그냥 그 자리에 보금자리를 틀어 싹을 틔우고
나는 그냥 그 곳에서 여우오줌 같은 햇살을 받으며 서 있었을 뿐이었는데.......
네가 내 황토 빛 가슴위로 스멀스멀 기어오르던 날
나는 처음으로 네 이름을 알게 되었어.
네 이름에서 새벽 솔숲의 맑은 공기 냄새가 났고
네 이름에서 쿵쾅쿵쾅 뛰어노는 심장 소리가 들렸어.
네 이름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쳤고
네 이름에는 주렁주렁 빨간 능금이 달려 있었어.
나는 네 이름을 자주 부르기 시작했지.
네 이름을 부르면 내 가슴에서 파도가 일렁였고
네 이름을 부르면 내 마음은 파란 하늘을 자주 올라갔고
네 이름을 부르면 내 몸은 붉은 해를 껴안은 듯 열병을 앓았지.
네 이름의 향기와 빛깔은 나만 알 수 있었고
나는 네 이름을 자주 부르기 시작했어.
너한테 가는 손길이 열리고
너를 부르는 말문이 트이고
내 마음에서 네 마음으로 강물이 흘렀지.
다른 사람이 부르면 그냥 스치는 바람소리였을 뿐이야.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도움이 되었지.
나는 네가 뻗는 줄기를 받치는 벽이 되고
너는 내가 비에 젖어 무너지지 않도록 우산이 되었어.
서로 등을 기대고 앉은 등받이 의자처럼
그렇게 서로 어울리는 풍경이 되고 배경이 되곤 했어.
아주 가끔 석양이 산 그림자를 만들어 저녁 들판에 넘어지면
너는 그림자를 내 가슴에 남기기 시작했어.
해는 꼭 너 먼저 비추었고 네 그림자는 내 가슴으로 넘어졌지.
해는 왜 그렇게 너를 먼저 찾아가 나한테 그림자로 넘어졌는지.........
그래도 네 그림자를 안으면 나는 참으로 행복했어.
네 그림자를 안을 수 있었으니까........
아주 가끔 청솔가지 태워 밥을 짓는 저녁 무렵이면
너는 울음소리를 내 가슴에 남기기 시작했어.
바람은 꼭 너한테 찾아가 너를 헤집어 울리고 나한테 울음소리로 다가왔지.
바람은 왜 그렇게 너를 울려 내 가슴을 쥐어뜯는지........
그래도 네 울음을 소리를 들으면 나는 참으로 행복했어.
네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바람이 전깃줄에 매달려 대롱거리던 가을 저녁
나는 너를 안고서도 너무 슬펐어.
노을은 타올라 네 몸을 덥히고 내 몸을 덥혔지만
내가 너무 작아 너를 담을 수 없다는 생각에 슬펐는지도 몰라.
아니면 네가 잔뿌리를 뻗어 내 몸에 박힐 때마다
내 마음이 하나 둘씩 갈라지기 시작했을지도 몰라.
네가 그 때 내뱉던 말들은 내게 송곳처럼 파고들어 너무 아팠어.
바람이 우편함에 갇혀 갈 길을 잃던 겨울 오후의 시간도 마찬가지였어.
나는 네 소리를 듣고서도 너무 아팠어.
귓볼 빨갛도록 마음은 타올라 네 아픔을 내 등에 짊어졌지만
나는 네 아픔에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아니면 네가 흐느껴 울 때 너를 울리는 것이
바람이 아니라 네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거야.
그때 나를 울리는 내 아픔을 보기 시작했어.
네가 그 때 흘리던 눈물은 베인 상처에 파고들어 너무 쓰라렸어.
그날 이후 너는 내 방안을 무척 보고 싶어 하는 날이 많아졌고
내 방에 세 들어 사는 따뜻한 손님들을 만나고 싶어 했어.
옷걸이며 어항의 물고기며 햇살 잘 드는 따뜻한 창가를 보고 싶어 했지.
따뜻한 내 방을 무척 그리워했지.
하지만 내 방은 사람하나 살지 않는 텅 빈 방이었지.
그림자 하나 담을 수 없을 만큼 싸늘히 식은 방이었어.
너를 그 차가운 방에 초대하여 맞이할 수는 없었어.
네가 내 방안으로 들어오면 너는 숨을 쉴 수도 없고 곧 죽게 될 것 같았으니까............
나는 너를 받아들일 수 없는 작고 초라한 방이 싫어 네게 방문을 열지 않았지.
내가 싫었어.
그래서 내 마음이 무척 아팠던 거야.
내가 미웠지.
그래서 슬퍼했던 거야.
너는 늦가을부터 시름시름 앓더니 겨울 바짝 마른 몸으로 떠나갔어.
.................우리 잠.시. 헤어지자.
헤어짐이 잠간 동안의 이별인지
다시 만날 기약인지 아니면 영원한 이별인지
기억에서조차 사라지는 헤어짐인지 묻지 말고
우.리. 헤.어.지.자.....................
너는 스며드는 눈길로 그렇게 잔정을 뻗더니
그만 뺄 수 없는 손길이 되고
네가 떠난 지금은 상처로 남은 것 같아.
너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을 거야.
내 가슴에 손가락 퍽퍽 찔러가며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을 거야.
안으면 안을수록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어.
흔들림으로 너는 너를 뻗어 올라 내게 그림자를 남겼고
팽팽함으로 나는 나를 버텨 차가운 방을 하나 찾았을 뿐이야.
아직은 추억하는 일조차 힘든 시간이야.
이제 앙상한 줄기로 남은 너에게
그 자리에 서서 화살처럼 날아가는 바람을 맞고 있는 내가
고백하고 싶은 게 있어.
너는 내가 서있는 이유를 알려주었고
처음으로 추운 바람과 맞댄 바깥벽, 그 안을 들여다보는 법을 알려 주었어.
바깥벽, 그 안에는 따뜻하게 잠잘 수 있는 방이 있던 거야.
바깥벽이 있으므로 방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어.
아궁이에 불 지펴 따뜻한 방을 데울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어.
지금은 바깥벽을 고치기보다는 벽이 만든 방을 따뜻하게 하려고 노력중이야.
너도 네 몸 줄기가 뜨거워지도록 네 뿌리를 더 질러 넣었으면 좋겠어.
땅 속에서 온기를 얻어 네 안이 따뜻해 졌으면 좋겠어.
이제 나는 네가 뻗을 수 있는 길이 되고 싶어.
그림자조차 허락하기 싫어하던 네가 내게 그림자를 드리워
내가 <네. 그.림.자.를. 받.쳐.줄. 나.>를 찾은 것처럼........
이제 나는 네가 차가운 날을 지낼 수 있는 온기도 갖고 싶어.
흐느끼는 울음소리로 내 빈방을 울려 주어
내가 <내. 안.의. 따.뜻.한. 방.>에 불 지펴 살 수 있었던 것처럼.......
그러고 보면 참 신기한 일이야.
그림자조차 허락하지 않던 네가 그림자를 받쳐 줄 나를 알고
울음소리조차 삼키던 네가 울음을 들어줄 나를 알고 있다는 것이........
이제는 내게 주었던 상처도 내 빈방을 찾아오는 새로운 손님이 되고
송곳처럼 파고들던 아픔이 방안을 덥혀주는 온기가 되었어.
너는 내 허름한 몸을 가려주는 옷이 되고 있어.
지금은 너에게 봄날 싹트는 씨앗하나 선물하고 싶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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