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主之權-나의 철학

겨울 산

nongbu84 2010. 1. 27. 23:19

겨울산

 

겨울산은 할아버지의 굽은 등,

척추 뼈만 앙상한 등을 타고

철부지 손자가 기어오르듯 산에 오른다.

 

은빛으로 빛나는 자작나무의 유혹,

깊은 계곡을 타고 오르는 바람에 놀라

소나무는 줄기마다 계곡을 만들고

잣나무는 겨울마다 푸른 누비옷을 걸쳤다.

눈을 깔고 앉아 검버섯이 도드라진 바위

짧은 마디 차라리 진한 초록으로 맺은 산대나무

유행을 쫓는 무리들과 다르다.

고풍의 온전한 의리를 지키며 산다.

 

저토록 속속들이 드러나는 산,

 

겨울 산에 사람들이 서 있다.

하얀 피부 큰 키의 귀공자, 피나무

벌어진 어깨 질긴 근육의 노동자, 물푸레나무

층층의 촛대를 받쳐 든 성직자, 층층나무

해 묵은 잎을 떨구지 못하는 어머니, 떡갈나무

나무들 사이 발자국이 났다.

송송하게 달아난 산토끼의 발자국,

황토 흙까지 퍼올린 멧돼지 발자국,

네잎클로버를 닮은 오소리 발자국,

함부로 걷지 않은 발자국만 남겼다.

그나마 새들이 날아올랐다.

화들짝 날아 성급하게 가시덤불로 내려앉는 꿩,

힘없이 날아올라 소나무 가지를 붙드는 산비둘기,

수수이삭 같은 붉나무 열매를 뜯어먹는 박새들,

바짝 마른 며느리 밑씻개 씨앗을 쫍는 딱새,

무리로 날며 씨앗을 퍼뜨려 먹은 값 한다.

 

겨울 산은 돌아앉아 침묵하지만

실 옷 하나 걸치지 않고 요란하게 떠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