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는 “서서 사람됨을 배우는 사람”이다.
1. “좋은 추억” 속에서 배운 것들: 까치밥에 대한 단상
감나무에 올라 장대로 감을 다 딸라치면 어머니는 어김없이 까치밥을 남기라는 명령을 쇳소리처럼 질렀고 아버지는 톱과 낫을 찾아 들고 사립문 밖으로 나가셨다. 고염 나무로 자라 버려질 쓸모없는 나무의 밑둥을 잘라내고 접을 붙여 감나무로 변화시키려는 아버지의 외출이 늘 어머니의 말씀 후에 이어졌다. 까치밥을 남기라는 말씀이 아버지에게는 늘 고염나무 밑둥에 감나무 순을 접목하라는 말씀으로 해석되는 그 연유가 참으로 신기했다. 아버지의 매서운 톱질과 낫질은 까치밥을 만들기 위해서도 꼭 필요했다. 어차피 다음해에도 까치는 늘 찾아오기 마련이었고, 그 까치를 위해서도 새로운 감나무는 필요하다는 것을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으니까 아버지의 해석은 틀림없었다. 아버지께서 고염나무 밑둥을 자르고 틈새를 만들어 감나무의 새순을 접붙이면 추운 계절 내내 안으로 안으로 보듬고, 감싸안고, 깊어져 다음 해면 어김없이 감나무로 자라나던 그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가장 춥게 움츠려 본 사람들이 봄기운에서 가장 먼저 기지개를 켤 수 있듯, 추위 속에서 넓힘보다는 깊어짐으로 성장한 감나무는 봄이면 한껏 기지개를 켤 줄 안다. 넓힘보다는 깊어짐이 추운 겨울을 견디는 방법이고, 깊어짐보다는 넓힘이 봄을 맞이하는 방법임을 감나무는 잘 알고 있다. 겨울과 봄 사이에 감나무는 넓힘과 깊어짐의 자기 전이와 변화를 원활히 하였다. 고염 나무에서 감나무로 변화하는 이치는 아버지의 "톱질과 낫질의 아픔이 있은 후에 상처를 아물리려는 자기 고통의 시간을 갖고 성장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완성의 시간은 까치밥이 생길 때쯤 될 것이다. 세상도 늘 그런 것이었다. 톱질과 낫질로 자기의 고름 섞인 옹아리진 부위를 도려내는 아픔의 시간이 필요하고, 그 후에는 상처를 아물리고 마알간 피를 가꿀 고통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었다. 내 마음밭도 알고보면 잡초와 곡식이 뒤섞인 밭과 같아, 잡초면 뽑아내고 알곡은 가꾸는 "아픔과 고통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었다. 사람은 기쁨과 즐거움이 그렇듯, 고통과 아픔을 통해서도 성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옛 성현들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통해 세상을 말고 투명하게 읽어내기 위해 자기 깨달음과 각성의 아픔을 가졌고, 성의정심(誠意正心)을 통해 마음 밭을 바르게 가꾸는 자기결단과 실천의 고통을 겪었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톱질과 낫질을 통한 "잘라냄과 도려냄"이 고염나무에서 감나무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꼭 필요하듯, 사람의 자기 완성도 "아픔과 고통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질 수 있음을 배웠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나면 고염나무에서 잘라냄으로 감나무로 전이된 나무에서는 감이 열렸고 그 감은 겨울철마다 늘 몇 개가 남아 먹을 것이 없는 날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어머니는 특별히 까치가 좋은 소식을 알려주기 위해 사람들의 집 주위에 몰려든다며 그 까치에게 먹을 것을 남겨 놓으라는 말씀을 쇠가 부딪치는 소리로 하셨다. 찬 서리 내린 추운 계절에 먹을 것 찾아 날아다니던 까치가 문득 홍시 하나 먹으러 왔다가 좋은 소식하나 떨구어 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삶의 바램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어머니는 "나누어 줌이 곧 되돌아 옴"이라는 인정살이의 원칙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까치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있어야 곧 좋은 소식이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깨달았던 것이 인정살이의 원칙이었더라도 감나무에 남겨 놓은 홍시 몇 개는 단순한 까치밥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떼어내어 매달아 두는 일"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내 마음을 떼어내어 매달아 두고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마음속으로 내 마음이 확장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이 다시 내 마음 안으로 되돌아와 서로 길들이는 "관계의 그물 만들기 작업"을 어머니는 날짐승과도 할 줄 아는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어머니의 까치밥은 내 세상살이에서도 실천해야 할 "내 마음 떼어내 다른 사람의 마음에 매달기"의 가르침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까치밥으로 남겨 놓는 것은 많은 것들 중에 가장 튼튼하고 견실한 것만을 남겨 놓으셨다. 사람들이 먹을 수 없는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을 남겨 놓는 것이 아니라 가장 틈실한 것만을 골라 남겨 놓은 그 이유를 깨달은 것은 그 다음해 봄 감나무 그늘에서 새로 태어난 새싹을 보았을 때였다. 어머니는 틈실한 것을 남겨 씨앗으로 삼고자 하는 지혜를 갖고 계셨다. 가장 틈실한 것을 골라 어떤 추위에도 얼어죽지 않고 견디었다가 살점은 까치가 먹고 손가락 한마디 만한 씨앗은 땅에 떨어져 씨앗으로 자랄 것이었다. 그래서 틈실한 것은 먹지 않고 씨앗을 보존하는 용도로 나무에 남겨놓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碩果不食(석과불식)이란 한자어는 몰라도 까치밥을 감나무 씨앗으로도 활용하는 삶의 지혜를 갖고 계셨다. 이런 어머니의 지혜는 "초라한 것은 내 품에 안고 더 좋은 것은 내 것으로 만들지 않고 이 세상 밖으로 내어보내 더 많은 이익을 준다"는 가르침을 내게 다가왔다. 초라하고 못생긴 것들은 우리가 거두어 들여 좋은 영양분으로 변화시켜야 하고 튼튼한 것들은 더 많은 것을 만드는 씨앗으로 남겨 까치에게도 사람들에게도 더 많은 이익을 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도 못나고 소외 받고 외로운 사람들은 내 품에 안아 그들의 친구가 되고 시간을 함께 나누고 그래서 그들의 삶도 가치 있음을 찾아주고, 더 능력있는 사람들은 자기 혼자의 이익과 편안함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밭에 희망의 씨앗을 심는 사람들이 되라는 삶의 가르침을 알려 주고 있다. 더 좋은 것은 내 집에 묶어 둘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해 세상으로 나가야 하며 세상으로 나갈 수 없는 것들은 내 안에서 가꾸어 보살펴야 한다. 우리 개인은 잘나고 좋은 것만을 찾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에서 이제는 보잘 것 없고 하찮은 것들을 껴안을 수 있는 자기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고 잘난 것일수록 세상을 향해 열어 주는 마음과 실천이 필요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함부로 버려질 것이 하나도 없고, 그 나름대로의 쓸모가 있는 법이다. 자갈밭에서 성장하여 커야하는 메밀꽃도 필요한 것이고, 세찬 물길에도 휩쓸려 꺾이지 않는 버들강아지도 필요한 것이고, 서까래로 이용될 큰 참나무도 필요한 법이다. 세상은 모난 것, 둥근 것, 쪼개진 것 그 어느 하나 쓸모 없는 것이 없고, 무엇이나 그 쓰임새가 따로 있는 법이다. 사람도 어느 누구하나 쓸모 없고 버림받고 소외 받을 사람이 없다. 이 세상 어디에선가 꼭 필요한 사람들이고,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각자의 쓰임새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인정하며 살되, 내 개인은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을 거두는 넉넉한 품과 둥지를 만들과 크고 빛나는 것일수록 세상을 향해 열어놓아 디딤돌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필요한 시간이다. 까치밥을 보면서 나는 아버지의 잘라냄과 어머니의 나누어줌을 늘 생각한다.
2 . “아이들”과 함께 살면서 배운 것들
(1) 교사의 삶은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일이고 자기의 꿈에 대해 책임을 지는 존재이다.
학교는 기초적인 지식 습득뿐만 아니라 사람을 존중하면서 함께 어우러지면서 살아가는 삶을 배우는 곳이다. 학교는 친구를 만나고 사람다움을 배우고 사람을 아끼는 것을 배우고 자기 삶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자기의 소망을 이루는 정성을 배우는 삶의 공간일 뿐이다.
우리는 살면서 아주 많은 일과 사람을 만난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을 보면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만들어 가는 일"이며, 또 하나는 "정성을 다해 그 무엇인가를 만들어 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일생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자기의 꿈을 만들어 가는 모습이 우리의 삶이다. 학자들은 이것을 <인격완성과 자아실현>이라고 이름 붙였고, 톨스토이도 이 두 가지의 중요성을 "인생론"이란 책에서 언급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순간은 바로 지금이요,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요,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다."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가는 창조자이다. 사람의 삶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관계를 만들고 정성을 다해 자기의 꿈을 만들어 갈 때 아름다워 질 수 있다. 사람을 사귈 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아주 오랫동안 사귈 수 있는 시간과 오랜 시간 상대에 대해 끊이지 않는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다. 사랑의 반대어가 미움이나 화가 아니라 무관심이란 점을 보면 관심의 지속은 사람을 사귀는 데 아주 중요하다. 오랜 시간 동안 끊이지 않는 관심을 유지하려면 내 것을 내어주는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새로 산 구두가 내 발에 익숙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내 발의 뒷꿈치가 까지는 아픔과 양보가 필요하듯, 사람을 사귈 때는 내 이익을 나눠주고 내 목소리를 낮추고 내 시간을 내어주고 내 감정을 나눠주고
내 삶을 내어주는 연습이 필요하다.
자기인생 전체를 통해 만들어 가는 꿈을 간직하고 이루어 가는 작업은 아름답다. 어느 선생님이 "꿈을 꾼다"를 해석할 때처럼, 꿈은 미래의 시간에서 빌려오는 것이다. 마치 빌려온 것이니까 우리는 오늘 하루를 살면서 되 갚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고, 그 빚을 갚지 않고 넘어가면 나의 부채는 더욱 늘어나고 나중에는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미래의 행복을 빌려오는 일이 우리의 꿈이니까 꼭 갚아야하고 그 갚는 방법은 "우리의 정직한 땀과 노력"이고 "희망과 가능성이 있는 아픔과 패배"이다. 자신의 꿈을 만들어 갈 때도 원칙이 있으니, 처음시작은 아주 미미하고 별 변화가 없는 듯하더라도 결코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조그만 도토리 씨앗이 나중에 큰 참나무로 변하듯, 나뭇잎을 갉아먹는 애벌레가 나중에 아름다운 나비로 변하듯, 우리의 꿈을 만드는 일도 처음에는 보이지도 않는 안개 속을 헤매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면 그 꿈은 이룰 수가 있다. 우리의 꿈이 탄생하는 것은 아주 작은 소망에서 출발한다. 순간의 선택과 생각에서 우리인생의 전체의 방향이 잡혀지고 인생전체를 결정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인생의 꿈을 이룬 사람들을 보면 자기의 머릿속에 있던 생각을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증명한 사람들이고, 자신이 한 생각에 책임을 질 사람들이다. 꿈은 그냥 이루어지는 법이 없다. 꿈은 "나의 정직한 노력과, 희망 있는 실패와 가능성을 열어놓는 아픔"을 통해 이루어진다.
(2)교사는 말이 아닌 삶으로 사람됨을 늘 배우고 가르치는 존재이다.
교사의 살아있는 삶만큼 이 세상에서 훌륭한 교과서는 없는 법이다. 교사의 삶이 아이들과 만나고 아이들의 삶이 교사의 삶 속에 파고들 때 교육은 가능한 법이다. 이 세상에서 교사는 자신의 교과서를 자신의 삶으로 써 나가는 사람이다.
자신의 삶은 늘 미완성의 상태이고 불완전하며 부족하고 실수 투성이 상태이므로 교사 자신도 늘 배워야 할 대상이 있다. 내게 가장 훌륭한 교사의 가르침을 주는 사람도 알고 보면 나의 아내와 나의 두 아이들, 내가 만나는 동료교사들, 친구들, 이 사회의 모든 사람이 교사에게 반면교사로 다가오고 영향을 주는 존재들이다.
내 두 아이가 하는 말 한마디에 내가 아버지를 자각하고 좋은 아버지가 되려고 하듯, 내가 교실에서 만나는 아이들의 표정,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내가 배워야 할 삶들이다. 그리고 교사가 아이들을 가르치고자 한다면 삶으로 이야기하고 삶으로 실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교육은 결코 말로써 하는 주장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하여 아이들 스스로가 보고 배우는 행동으로써 하는 영향 일뿐이다.
(3)교사의 꿈은 아래로 흘러 내려가는 물의 속성을 닮아야 한다.
꿈을 위로만 꾸지 말고 옆으로도 나아가고 아래로도 내려가는 꿈을 꿀 줄 알아야 한다. 위로만 오르는 꿈은 밟는 존재와 밟히는 존재라는 실존의 구조를 가지기 때문에 비인간적인 삶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지배자의 기쁨은 피지배자의 눈물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위로만 오르는 상승의 꿈은 딛고 오를 수 있는 기반, 즉 밟히는 존재가 있을 때만 그 위에 설 수 있다. 결국 수직 상승의 꿈이란 밟고 오름 또는 딛고 일어섬이란 실존 구조를 통해 이루어지므로 아무리 높은 꿈에 도달하였더라도 그 삶은 허망하고 비인간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옆으로 나가는 "게의 걸음을 닮은 꿈"과 아래로 내려가는 "물의 흐름을 닮은 꿈"이 절실히 필요할 뿐이다.
지금 우리는 경쟁에서 이겨 밟고 올라서는 꿈에 익숙한 종족으로 변하였다. 위로만 오르는 꿈이 가장 편안한 옷처럼 우리에게 너무도 편한 가치관으로 자리잡았다. 오히려 옆으로 나아가는 꿈이나 아래로 내려가는 꿈은 값어치 없는 골동품 취급을 받거나 아니면 시대의 낙오자로 떠밀려간 사람들의 궤적으로만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시대의 모순을 무디게 하는 '착한 바보'의 선택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현실은 가장 높이 오르고 가장 많이 소유하고 가장 편하게 살고 가장 풍요롭게 소비하기 위한 삶만을 강요하고 있다. "소유와 소비"의 삶만이 있고 "나눔과 창조"의 삶만은 사라져 가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꿈을 꾸는 방법이 거꾸로 꾸어온 모습이었다. 우리들이 꿈꾸었던 방법은 위에서 아래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향하는 방법에 익숙해 있다. 크고 높은 것만이 귀중하고, 작고 낮은 것은 비천하게 여기는 어리석은 판단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릴 적부터 사회적 명예와 경제적 풍요로움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꿈을 만든다. 어릴 적부터 평범한 현재와 '익숙한 살림살이'를 부정하는 데 길들여진다. 판사 변호사 박사 등 사자 돌림의 직업들을 최고의 꿈으로 여기면서 그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라도 맞서 그 꿈을 이루고자 애쓴다. 과연 가장 좋고 훌륭한 꿈인가란 질문은 높은 곳에 도달하는 데 발을 거는 옹이일 뿐이다. 나와 남이 함께 좋은 꿈을 추구하면 내 개인의 최고의 꿈은 사라져 버리기 쉽다. 어릴 적 우리의 꿈은 대통령을 꿈꾸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 다음은 판사 그 다음은 변호사 그 다음은 장군, 그 다음은 육사생도, 그 다음은 공무원, 그 다음은 사업가, 그 다음은 그저 평범하고 안정된 직장 생활, 그 다음은 ...........
너무 큰 명예와 높은 사회적 지위를 자신의 꿈으로 내면화하면서 치열한 경쟁을 배우고 희망 없는 패배를 경험한다. 그런 후에는 작아진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고 실패한 자신의 꿈에 한탄하고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향수만을 술자리 안주 삼아 살아간다.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훈련받으며 결국에는 자기를 미워하는 데 익숙해진다. 크고 높은 꿈을 추구하면서 배운 것은 자신을 미워하는 일이고 자신에 대한 열등감을 내면화하는 일이다.
바로 옆에 있는 작고 하찮은 것들은 빨리 훌훌 털어 내야 할 먼지일 뿐이고 바로 지금 만나는 못생기고 단점 많은 가족들은 버려야 하는 인습의 옷일 뿐이고 바로 당장 내 안에 존재하는 아픔과 상처는 감싸안아서는 안 되는 도깨비불 같은 것이다. 작은 것, 보잘 것 없는 것, 아픈 것, 찌그러진 것, 울퉁불퉁한 것, 모난 것, 굽은 것에 대한 애착은 미래를 누릴 자격을 뺏긴다.
수직상승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언젠가는 내려오게 마련이다. 위로만 오르는 계단식 꿈도 언젠가 처절한 내려옴의 시간을 맞는다. <크고 높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꿈꾸던 배고픈 날들의 꿈은 이제 접어야 한다. 이제는 <작고 낮으면서도 마음에 꼭 맞는 것>을 꿈꾸어야 한다. 이제는 아래로 내려가는 "물의 흐름을 닮은 꿈"을 꿀 줄 알아야 한다. 물은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면서도 온갖 만물에게 영양분을 제공한다. 그러면서도 거침없이 자유롭게 흐른다. 우리의 꿈은 물의 흐름을 닮아야 한다. 또한 우리의 꿈은 옆으로 기어가는 게의 걸음을 닮아야 한다. 넓은 곳을 보고 조근 조근 걸어가는 "게의 걸음을 닮은 꿈"을 꿀 줄 알아야 한다. 게에게 있어 높은 중요하지 않다. 얼마만큼 넓이 볼 수 있고 넓게 갈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그러면서도 바닷물의 위세를 다룰 줄 안다. 우리의 꿈은 게의 걸음걸이를 닮아야 한다.
(4)교사의 삶이 늘 아이들의 삶과 엮어져 있을 때 아이들의 이해가 가능하다.
1)이해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다.
새로운 신발을 사 신었을 때 그것이 내 발에 꼭 맞는 편안한 신발이 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내 발 뒷꿈치가 상처가 나고 굳어지는 아픔이 필요하고, 신발의 이곳저곳이 닳아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한 사람을 이해하는 데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첫 만남의 인상부터 온 정성과 마음이 필요하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관심의 표현이 필요하고 지치지 않는 인내가 필요하고 화와 분노를 삭여야 하는 양보가 필요하다. 우리가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단 한 사람이라도 편견 없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상대를 충분히 사랑하고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교사라는 옷을 입고 교실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아이들에 대한 무지 속에서 헤매기 시작한다. 이해할 수 없었던 아이들이 우리의 사고 범위 안에 포착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아이들을 각색하고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 편견은 우리의 성급한 판단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아주 많고 아주 적은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노리는 경제 효율성의 원칙에 맞추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제는 아주 천천히 서두르지 말고 아이들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내가 힘들다고 아이들 탓하지 말고 빨리 매듭짓고 결정지으려는 나의 조급함을 참고 아주 천천히 아주 오랫동안 만나고 또 만나 이해하여야 한다.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고 눈에 띄는 결과가 즉시 나올 리 없는 일임을 알고, 내가 뿌린 씨앗의 결과를 내 이익으로 환산하려는 이기적 욕심을 걷어내어야 한다.
2) 이해의 첫 걸음은 아이들과의 구체적인 만남에서 출발한다
아이들과의 만남이 문제중심의 부정적 모티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수업시간마다 졸음에 겨워하는 아이들과 혼몽한 상태에서 만나고 지각한 아이들과 만나고 조회시간 쓰레기 안 버리기 150명 서명 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수업시간 졸고 떠드는 아이들과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고 학생부에 끌려간 아이 뒤처리하고 담배피고 싸운 아이들 봉사활동 시키고 돈 뺏고 폭력에 휘말린 아이들에게 한마디하고 자율학습 도망가지 말라고 협박하고 .....
어느 한 가지 만남을 보아도 긍정적 모티브에 의해 창의적인 만남을 찾을 길이 없다.
생일 맞은 아이에게 격려하고 반을 위해 모임일기노트를 준비한 아이에게 칭찬하고 관악반 경연대회에 참여하여 노력한 아이에게 함께 박수 쳐주고 친구 아버지의 문상에 함께 가는 만남의 아름다움을 찾고 ........
찾고 만들면 얼마든지 아이들을 긍정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와 계기는 많은 데도 말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문제 중심의 부정적 모티브를 긍정적인 만남으로 변화시키는 일일 것이다. 교사는 모름지기 문제 중심의 만남을 긍정적인 만남으로 승화시키는 능력이 더욱 요청되는 사람들이다.
싸움에 휘말린 아이의 잘못을 함께 책임질 줄 아는 아이의 마음을 만나게 하고 부모의 단점과 실수까지도 사랑하고 이해하는 아이의 만남을 만나게 하고 아이들 스스로가 변화와 자신에 대해 긍정하고 긍지를 가질 수 있는 만남을 만들고...........
긍정적인 만남의 형태는 얼마든지 시간을 투자하고 프로그램만 알면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문제중심의 만남을 긍정적인 만남으로 변화시키는 일은 시간도 시간이지만 교사 자신의 삶을 가꿀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기회가 되고 그 해결 능력에 따라 교사의 정체성과 보람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이 보인다.
우리는 아이들과 늘 구체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그런데 그 만남이 겉돌기 쉽고 헛돌기 쉽고 아이들에 이해로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단편적이고 우연한 만남, 소비적이고 일회적인 만남, 차라리 만나지 않은 것보다 나을 것이 없는 만남 속에서 헤매고 있다.
이런 만남을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우선 긍정적인 만남이 필요하고 그 다음 문제 중심의 부정적인 만남을 긍정적인 만남으로 변화시키는 노력과 방법의 개선이다.
우선은 아주 많은 긍정적인 만남을 자질 필요가 있다. 지금은 만남의 질보다는 만남의 양이 더욱 필요하고 요청된다. 아침에 아픈 아이를 만나고 습관적으로 변한 아이의 지각의 이면에 자리잡고 있을 가정의 불화를 만나고 수업시간 졸고 떠드는 아이들의 불안한 정서와 만나고 그들의 학습장애를 만나고 점심시간 교실에 올라가 도시락 싸오지 못하는 아이들과 만나고 청소시간 자율학습을 새로 시작한 아이와 만나고 ............
아이들을 섣부르게 변화시키고 뜯어고치려 하지말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부터 인정해야 한다. 단 한시간의 이야기와 교훈으로 변화될 아이들이었으면 교사란 필요 없었을 것이다.
교사란 모름지기 오랜 시간의 사랑과 인내와 관심을 집중적이고 의도적으로 표현 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많은 긍정적인 만남들 속에서 그 만남 들을 차츰차츰 질적으로 변화시키고 아이가 자기 삶을 사랑하고 정성을 다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렇게 살아가는 일이 우리 교사에게도 아이들 주변에서 겉돌지 않고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보람을 찾는 길일 것이다.
3. “꿈”을 통해 만드는 교사의 삶 : 나는 이런 교사가 되고 싶다.
나는 이런 교사가 되고 싶다.
아이들과 함께 손잡고 교문을 걸어나가면서
삶의 고민들을 다정하게 들어줄 수 있고
삶이 지치고 앞도 볼 수 없을 때
늘 찾아오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
쉬어갈 수 있는 조그만 참나무 그늘이 되고 싶다.
나는 이런 교사는 되고 싶지 않다.
아이들 위에서 힘과 지위를 가지고 군림하면서
아이들에게 사람을 지배하는 방법만을 가르치고
어설픈 도덕적 잣대로 아이들 인생 전체를 재단하면서
아이들에게 열등감을 심어주는 하사관이 되고 싶지 않다.
아이들이 자기의 현재를 부정하고
자기가 현재 만나는 사람을 부정하고
자기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을 부정하도록 가르쳐
아이들이 자기 삶을 미워하고
아이들이 자기 삶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이 되도록
통제하고 억압하는 일직사령이 되고 싶지는 않다.
아이들이 나를 볼 때마다
슬금슬금 피하면서 눈치를 보게 만드는
완장을 팔뚝에 찬 권력의 하수인이 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이런 교사가 되고 싶다.
어둠 속을 헤매는 듯
안개 속을 헤매는 듯
앞이 보이지 않고 제 자리만을 맴돌고 있을 때
방향을 응시하는 눈빛과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을 가지고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등받이 의자가 되고 싶다.
추운 삶의 겨울이 찾아오면
화톳불을 피워 놓아 언 마음과 손을 녹일 수 있는
말하자면 간이역 같은 역할을 맡고 싶다.
추운 삶의 겨울이 오더라도
언 발과 손을 녹이고 지친 마음을 달래면서
다음에 오는 기차를 기다릴 수 정류장의 간이 의자가 되고 싶다.
나는 이런 교사는 되고 싶지 않다.
친구와 어깨동무하며 살아가는 최선의 삶보다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고가 되는 삶을 살라고
눈에 힘주고 목에 힘주어 이야기하는 동네 이장이 되고 싶지는 않다.
친구의 처지를 이해하고 친구의 처지를 함께 겪는 일보다
공부를 통해 출세하고 내 편안과 이익을 위해 사는 일이 중요하다고
아침저녁 양복을 쫙 빼 입고 근엄한 표정으로
채찍질하는 기수가 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이런 교사가 되고 싶다.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들어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그 곳에 위치하는 물이 되고 싶다.
모든 나무와 곡식과 소에게 영양을 제공하고
아무리 더러운 물질이 파고들어도 깨끗하게 소화하고
오히려 정화해 낼 수 있는 물이 되고 싶다.
물의 겸손과 지혜를 배우면서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이런 교사는 되고 싶지 않다.
권력을 가진 자나 지위를 가진 자의 이익을 위해
상사의 말은 잘 들으면서도
마음속에는 아이들의 삶을 담지 못하고
권력의 욕심과 지위의 욕심을 담고 살아가는
출세주의자나 기회주의자는 되고 싶지 않다.
아이들의 불편이나 고민을 듣기보다는
아이들에게 훈계만을 일삼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아이들의 이익을 위해 조그만 시간과 마음을 내지 못하면서도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열정을 내는
충혈된 눈의 장사꾼이 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이런 교사가 되고 싶다.
단 하루만이라도 내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 생각을
내 감정을
내 마음을
내 삶을 나누며 살아가는 주체적인 인간이 되고 싶다.
늘 떠밀리듯 늘 어쩔 수 없이
늘 삶의 주변을 맴돌면서
이리저리 헤매는 주변인이 아니라
아이들의 함박 웃음으로 가득 찬 운동장을 함께 뛰면서 놀고
아이들의 먹빛을 닮은 눈동자들이 가득 찬 교실에서 열띤 토론을 하고
아이들의 맑은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삶의 이야기를 하면서
나를 찍는 세상의 도끼에게 향을 발라 보내는 향나무처럼
향기를 오래 지니고 싶다.
눈물이 있는 수업을 하고
마음을 나누는 수업을 하고
끝종이 울려도 더 하고 싶고 듣고 싶을 만큼
아이들의 삶과 내 삶이 만나는 수업을 하고 싶다.
나는 이런 교사가 되고 싶지 않다.
머리 모양과 머리 길이를 통제하고
옷 모양을 통제하면서
"용모단정"을 교육으로 치장하고
아이들 길들이는 것을 아이들을 보호하는 일로 착각하고
아이들의 능력을 키워주기보다 조그만 혜택을 내려
결국은 말 잘 듣는 어리석은 바보를 만들고 싶지는 않다.
아이들이 하루가 즐거워지는 일에 만족하기 보다
인생전체의 행복을 만드는 일에 힘쓰도록
애정 있는 비판을 할 수 있는 가르침을 갖고 싶다.
나는 이런 교사가 되고 싶다.
분단의식으로 자기를 검열하지 않고
권력을 쫓아 이익을 쫓아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는
비굴과 굴종을 지니지 않고
마음의 거울로 자기를 바라보며
사람들 속에 비추어지는 내 삶으로
나를 검열할 수 있는
그런 거울이 되고 싶다.
나를 보면서
단 한 명의 아이라도 훌륭해지고
단 한 명의 아이라도 행복해지고
단 한 명이 있는 교실이라도 나아질 수 있는
그런 일을 하고 싶다.
내 말과 행동으로 인해
단 한 명의 아이에게라도 희망이 되고
꿈과 용기를 줄 수 있는
그런 교사가 되고 싶다.
나는 이런 교사가 되고 싶지는 않다.
아이들에게 침묵과 순종만을 강요하고
아이들에게 시험문제를 잘 풀어 높은 점수만을 따내는 기계처럼 만들고
아이들에게 늘 험한 얼굴 표정과 성난 목소리로
미래를 위해 현재의 사람과 삶을 희생하라고 소리치는
새마을 운동의 기수가 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이런 교사가 되고 싶다.
옳지 못한 것을 보면 옳지 못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위로만 올라가는 꿈이 아니라 옆으로도 아래로도 내려갈 수 있는 꿈을 지니고
친구를 위해서 불편함과 수고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호연한 기운을 지닌
간디를 닮은 교사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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