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 아침에는 찔레꽃 가시가 가슴을 콕콕 찌른다.
상큼한 오이향기가 나는 아이들을 보면 인사조차 받기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다.
아이들 앞에 교사로 선다는 것,
그 마음언저리에는 부끄러움과 아픔이 먼저 가슴을 저리게 만든다.
나쁜(?) 녀석들이다. 아픔과 부끄러움부터 먼저 주는 녀석들이다.
이녀석들 때문에 상대의 아픔과 상처를 먼저 보는 연습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이 녀석들은 아주 좋은 가르침을 주는 선생들이다.
화들짝 놀란 첫사랑의 연인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았는데........
곤히 잠자고 있는 아들 녀석의 볼에 입을 맞추고 나오는 출근길에도 부끄럽지 않았는데.........
아카시아 향내 진동하는 숲길 새소리도 즐거웠는데...
등뒤로 떠오른 태양을 짊어지고 걸으면 그보다 즐거운 일은 없었는데.......
스승의 날 아침에 아이들 눈빛을 보면
왜 이리 어색하고 난감한 기분이 드는지.........
아이들로 향하던 외침이 내 안으로 파고드는 가시가 되는 것은 왜 일까?
아이들을 쏘아대던 눈빛이 내 행동을 되짚어보는 거울이 되는 것은 왜 일까?
잠시 고개 숙여보면 내 마음 욕심이 보인다.
잠시 눈을 들어 먼 산을 바라보면 10여년의 학교생활이 부끄러움으로 달아오른다.
한때는 교사라는 의미를 아이들에게 받는 선물의 양과 꽃다발의 크기에서 찾는 내가 보였다. 그런 내가 너무 싫었다.
한때는 교사라는 의미를 나를 좋아한다는 분위기와 아이들이 보내는 존경의 의미에서 찾는 내가 보였다. 그런 내 자신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한때는 교사라는 의미를 나로 인해 희망을 갖는 아이들을 보면서 내가 제법 좋은 교사라고 생각하였다. 그런 자신을 보는 것은 제법 부끄러운 일이었다.
한때는 교사가 아이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자신을 보는 것은 너무 건방진 생각이었다.
한때는 학부모들의 칭찬과 아이들의 신뢰가 ‘잘하는 교사’로 평가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자신을 보는 것은 내가 겉돌고 있는 교사임을 보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해 스승의 날에는 제법 우쭐대기도 하였다. 넘쳐나는 꽃다발과 선물로 나는 좋은 교사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어느 해 스승의 날에는 너무 우울하기도 했고 속상하기도 했다. 찾아오는 아이 한 명 없고 전화 한 통화 없는 녀석들이 야속하기도 했다. 그런 날은 쓴 소주로 속을 달래고 취해 교사인 나를 처절하게 채찍질하기도 했다.
어느 해 스승의 날에는 감동이 다가오기도 하였다. 아이들의 삶을 만나 이야기하고 아이들 스스로가 과거의 상처를 딛고 어떻게 일어섰는가를 듣다보면 ‘이 녀석들이 나의 스승이구나’ 하는 탄식이 저절로 나오기도 하였다.
교사로 처음 아이들 앞에 서던 첫해,
내 눈에는 오직 전체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수업시간만 열심히 하고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일주일 전 수업준비를 잘하는 것만이 중요했고, 준비없이도 수업하는 선생님들이 부러웠다. 아직 내가 일부분만이 전부라고 착각하고 있었고, 아이들이 “시대와 사회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두 번째로 아이들 앞에 서던 해,
이제 아이들이 전체가 아니라 “친해진 몇몇의 아이들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일”이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작년에 결혼한 그 아이와 늘 같은 버스를 타고 이야기를 나누며 가는 퇴근길이 너무 행복하기도 하였다. 교감한테 불려가 그런 수업을 왜하냐고 타박을 듣는 것은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다만 개인적인 친밀감의 형성이 아주 중요한 교육적 테마였고 아직 나는 개인적인 인간관계형성의 틀을 벗어나 행복한 삶을 방해하는 권위적이고 관습적인 교육적 행태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학교를 옮겨 새로운 학교로 전근해 아이들 앞에 서던 세 번째 해,
새로운 수업 방법과 실험으로 교육을 하고, 나도 빨리 담임이 되고 싶었다. 담임이 되어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좋은 추억을 함께 만들고 아이들을 이해하는 친구같은 담임”이 되고 싶었다. 아직 내가 고염나무를 자르고 새롭게 나무를 접목하여 감나무를 만드는 교육적 의미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첫사랑처럼 가슴과 정열을 불태웠던 첫담임의 네 번째 해,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나누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감히 “아이들과의 인간적인 만남이교육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했다. 따뜻한 만남의 시간이 많을수록 아이들이 더 의존적이 되고 스스로 설 수 있는 힘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두 번째 담임을 하던 다섯번째의 해,
나는 점차 아이들을 다루는 기술이 노련해져 갔고 아이들에게 “다정다감한 여유”가 생겼다. 아직 내가 아이들 스스로가 행복해지는 것보다는 내 위주의 교육을 펼치고 있으며, 교사 중심은 아이들을 주변인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나 힘들다고 기억되는 여섯 번째의 해,
아이들의 결석이 잦았고 자퇴와 직업반으로 빠져나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무력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교육이 갈수록 힘들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고 교육을 방해하는 역할은 ‘내 옆자리의 또 하나의 교사’임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나는 교사로서의 무력감과 아이들의 삶에 아무런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고 어쩌면 내가 “아이들의 삶을 방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일곱 번째의 해,
“아이들을 통해 내가 배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말한마디 행동하나 표정하나가 나를 서운하게도 하였고 나를 슬프게도 하였다. 그러면서 잠을 못자는 날이 많아졌고 새롭게 나를 변화시켜야 할 절실함을 느꼈다. <나의 가장 훌륭한 교사는 아이들이었고 나의 가장 좋은 교재는 아이들이 안고 살고 있는 삶의 문제>였다.
그 아이를 만난 여덟 번째의 해,
“아이들은 자신의 인생은 자신에게 있음을 이미 알고 있는 아이들”이었음을 알았고, 아이들은 스스로가 인생의 주인공임을 주장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교사 중심에서 교사와 아이들 각자의 주체성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일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임을 알 수 있었다. 주체적인 삶과 교육활동을 펼치는 데 방해하는 것들과의 싸움이 사랑임을 몸으로 실천하고 싶었다.
아홉 번째의 해,
교육이 아이들과의 관계형성만이 아닌 <행복한 교육활동을 방해하는 구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늘 가슴앓이만하고 늘 침묵하며 내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자기검열과 사상검열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마음의 길을 떠나는 눈이 생겼고 틈새를 내 온몸으로 들이밀어 막는 열정이 사라진 아쉬움을 한편으로 느끼며, “”집을 나온 아이의 외로움하나가 내 친구처럼 느껴지는 시간“”으로 자리잡기도 하였다.
열 번째 해,
아이들에게 용기와 안정감을 주기 위해서는 늘 겸손하고 <나를 낮추어야 함>을 알기 시작했다. 소리나지 않게 움직이는 교사의 발걸음과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파장음같은 말과 아주 오래전에 <길에서 주워담아 놓았던 돌멩이를 꺼내보면 그 돌이 보석이었음>을 알 수 있는 지혜가 중요함을 알게 되었다.
고3담임이 된 열 한번째 해,
내가 아닌 아이들 스스로가 아이들의 희망으로 자리잡도록
<꼭 그 자리에 그 아이가 설 수 있도록 교육하고 싶다는 소망>하나 갖고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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