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교사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어려움
교사로서의 삶은 교육적 문제에 대한 갈등과 고민의 연속과정이다. 13년간의 교직생활을 하면서 던졌던 화두는 “교사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었다...... “교사란 무엇인가?” “교사로서 내 자신과 아이들의 삶을 어떻게 하면 희망으로 가득차게 만들것인가”........늘 하루하루를 생활하면서 “교사로서의 공적인 자아를 보람있는 자화상으로 만들 수 있는 실천의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였고 어려웠다. 11년간의 교직 생활을 통해 내 안에서 겪었던 어려움은 <내가 지녔던 교사의 모습>이었다. 이 모습들은 내 자신에게는 가장 힘든 문제였다.
1)이익에만 골몰했던 교사로서의 내 모습
①<겪음> : 처음 교직에 들어서면서 ‘아이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겠다’고 다짐하였다. 하지만 그 사명감이 방향이 없는 맹목적 신념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이들은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았고, 내가 겪어온 삶의 문제보다 더 많은 삶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교육현장에서 만나는 문제상황들은 많았고, 그 때마다 너무 편안한 방법으로 해결해가고 있는 모습이 자주 발견되었다. 수업시간 아이들이 떠들면 매와 체벌에 의존하여 처리하고, 가출하면 아이를 다그치고 혼내기 일쑤였으며, 아이들 개개인의 고민을 들어주는 역할보다는 한 학급전체를 일사불란하게 지휘통솔하는 하사관의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개인보다는 집단전체가 중요하였으며 긍정적인 계기로 아이들을 만나는 것보다는 부정적인 모티브로 아이들을 만나 화내는 심판관의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이들을 통해 존경심을 얻고, 인기를 얻고, 권력을 얻어 제왕적 권위를 누리고 싶었다. 점차로 나는 교실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제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교실에서는 내 목소리만이 존재했고, 아이들은 침묵과 조용함으로 순종하며 말잘들으며 생활해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자기를 반듯한 자세와 공손한 태도로 자기를 나타내며 서로 잘 보이기 위한 경쟁을 벌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뒤돌아서면 교사를 불신하고 있었다. 내가 아이들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통솔하고 감독하는 동안 아이들은 이중적 인격이 형성 되어갔고, 내 안에서는 내 삶을 주체적으로 만들어가지 못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아이들과의 교육적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는 문제상황의 주변에서만 겉돌고 있었다. 그럴수록 내 삶의 소외감은 더욱 커져갔다.
②<딛고 일어섬> : 학교 교문을 들어서면서 교사들은 서로 다른 동기들을 갖고 들어선다. 권력이나 경제적 이익이나, 존경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하는 자신의 모습을 꿈꾸며 들어선다. 교사들의 동기는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아이들을 위해 교육한다’는 면에서는 동일하며 너무도 순수하다. 하지만 ‘아이들을 위해 교육한다’는 동기아래 잘못된 교육방법과 원칙이 통용되고 있으며, 너무 많은 교육활동의 잘못을 범하기도 한다. ‘아이들을 위한다’는 교사들의 동기를 비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동기아래 행해진 행동의 결과는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책임질 행동이 된다. 교사 개인의 순수한 동기에서 출발한 교육적 활동은 교사 자신의 교육적 행동의 결과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활동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교사는 순수한 동기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그 동기를 행동으로 옮긴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하는 존재이다. 순수한 동기와 사회적 책임을 함께 아우를 수 있는 활동만이 교육적 가치를 지닌다. 이 준엄한 도덕성의 확립이 없다면 교사는 늘 순수한 동기로 자신의 잘못된 교육적 내용과 활동에 대해 변명하는 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자기의 동기에 골몰하는 교사에게 아이들은 대상화된 사물로 나타나며 ‘나와 너’의 인간관계형성은 불가능하게 된다. 오히려 동기만으로 교육활동이 자리매김되면 아이들은 교사의 이익을 위해 동원되는 수단이 될 위험성이 높다.
2)아이들의 희망이 되고자 애썼던 내 모습
①<겪음> : 교직 경험이 쌓여갈수록 나는 자신에게 교사의 재산은 아이들의 존경에 있음을 암시하며 존경받을 수 있는 교육적 방법을 모색해 보기도 하였다. 교직에 대한 사명감으로 힘든 상황을 달래가며 아이들의 모범이 되고자 애썼다. 아이들에게 생일날에 편지를 보내고 아이들과 함께 매년 방학때면 ‘사제동행 설악산여행’을 떠나고, 성남에서 정동진까지 250여 킬로미터를 도보로 여행하는 ‘국토횡단 도보여행’을 하였으며, 한 학년을 보내면 늘 330여페이지에 해당하는 학급문집을 만들어 한해 동안의 교육적 활동을 글로 묶어내기도 하였다. 늘 아이들과 함께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며 아이들의 등교시간보다 10분일찍 교실에 들어가 아이들을 기다리기도 하였다.
교사인 내 자신의 삶이 가장 훌륭한 아이들의 교과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내 삶의 태도와 행동”을 통해 아이들이 훌륭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아이들의 생활에서 흡연이나 싸움, 게으른 학습태도, 이성교제의 혼란함 같은 문제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아이들의 마음에 진정어린 호소를 하였다. 더 나아가 내가 아이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치기도 하였고 또한 아이들 스스로가 해결할 많은 문제를 내 손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적극성을 보였다. 하지만 아이들의 삶에 내가 적극적으로 개입 할수록 아이들은 주변에서 맴돌았고 아이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나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높아져감을 느꼈다. 교사중심의 교육적 활동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교사중심의 교육활동은 아이들 스스로 자기 삶을 천천히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없애고 있었다. 아이들 스스로 교실에 떨어진 휴지한장 줍는 아이를 보는 일이 드물었고, 시켜야 마지못해 줍는 타성적인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아이들 스스로 아침에 학교에 오면 창문을 열고 커텐을 묶어 정돈하는 모습을 보기가 어려웠다. 시켜야 겨우 움직였으며 지시에 충실히 따르는 모습을 보는 날이 많아졌다. 교실에서 싸움이 나도 구경하고 말리는 아이를 찾기가 어려웠고 자신의 이익과 관련없는 문제에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띄게 많아졌다.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사랑하며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며 자기의 삶을 만들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중심은 늘 주변을 만들며 주변은 늘 비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부끄럽게 여긴다. 교실에서 주변화된 아이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감 대신 자신을 내버려 방치해두는 구경꾼의 삶으로 전락되기 쉽다. 모든 것이 교사중심으로 이루어져 학급경영이나 관리, 환경의 깨끗함등은 이루어내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아이들의 삶은 비주체적으로 움직이는 수동적 성향이 발달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대학진학에 도움이 되고 이익이 되는 행동특성만이 발달하고 있었다.
②<딛고 일어섬> : 아이들의 인생이 교사를 닮도록 하는 교육적 활동은 아이들의 삶을 비주체적으로 만들어갈 위험성이 높다. 교사를 모범으로 삼고 교사를 닮고자 하는 교육적 활동이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가 자신을 자신의 희망으로 삼도록 도움을 줄수 있는 교육적 활동이 필요하다. 교육이란 아이들의 자발적 삶의 추구에 대한 믿음이 근저를 이룬다. 아이들 스스로가 자기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믿음만이 아이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 교사의 그런 믿음이 있을 때 아이들은 자신을 희망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 이미 아이들 속에는 아이들의 인생 문제를 해결할 열쇠가 주어져 있다. 아이들은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는 삶의 방법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아이들 스스로가 서툴지만 천천히 자기 삶을 만들어가고 자기를 선택하며 책임질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이들은 자신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을 권리가 있고, 교사는 그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촉매제 역할을 하면 된다. 아이들 스스로가 자기 인생의 문제를 객관화시켜 땀흘려 살아가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도록 교육적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 아이들 스스로가 자기가 만나는 사람에 애정을 쏟으며 자신이 하는 일에 열정을 다하는 삶을 살도록 교육적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 오히려 아이들을 통해 교사도 배우는 상태를 이루어야 한다. 아이들은 자신의 삶을 교과서로 삶아 반성해보고 검토하며 교사는 자신의 교육적 활동을 교과서로 삼아 함께 살아가야 한다. 교실에서의 수업한시간도 아이들과 교사의 삶일뿐이다. 그 한시간이 대학입시만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거나 참아야 될 굴종의 상황이거나 인내의 시험장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2. 침묵으로 일관되었던 교사들의 인간관계와 문화에서 오는 어려움
1)직원회의에서 나타난 침묵의 문화
교무부장은 기말고사계획을 전달하고 출제에 관한 몇 가지 유의사항을 전달한다. 평균 78점 이상이 되어야 하고, 반별 학급 평균 차가 10점이 넘지 않도록 해야 하고, 서술형 문제는 40%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전달한다. 학생부장은두발단정과 교복단정에 관한 강력한 담임의 지도를 전달한다. 특활 부장은 특기적성 교육에 관한 전달을 하고, 과학 부장은 각종 경시대회에 관한 전달을 하고 정보부장은 천리안 아이디 갖기 운동에 관해 전달한다. 상급기관에서 내려온 온갖 공문서에 따라 각 부장은 담임에게 전달하고 담임은 아이들에게 전달한다.
교사들의 관계는 무엇이든지 전달하고 침묵으로 듣는 문화에 익숙해 있다. 애정어린 비판과 토론의 문화를 찾을 수가 없다. 가장 활기 있는 시간은 직원회의가 끝나고 나오면서 투덜대는 교사들의 한 마디가 섞였을 때뿐이다. 내가 겪은 또하나의 어려움은 “그 침묵의 일상화”속에서 생활하는 일이었다. 아직도 교사들의 인간관계 속에는 애정 어린 비판과 토론이 없다. 그저 전달하고 침묵으로 듣는 일이다. 교사들은 대부분 전달한 것을 교실에 가서 다시 반복하는 앵무새의 역할을 불만족스럽지만 하고 있다. 교사들은 상급자의 전달을 침묵하고 듣는 데 더 익숙한 모습이다. 질문을 던지거나 비판하는 교사는 그 침묵의 나라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침묵하는 직원회의, 그 회의 속에서 교사들은 자기의 의견을 전면에 내세우고 책임을 지려는 자율적인 태도가 오히려 부담스러울 뿐이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오직 어떤 일에 대한 책임추궁이 자신에게만 없으면 좋고, 내게 아무 불이익만 없으면 된다는 태도를 편안하게 여기고 있다. 침묵만이 미덕으로 교사들의 인간관계를 맺어놓고 있다.
2)관심과 애정을 담은 비판적 인간관계의 형성을 위한 노력
교사들의 침묵의 문화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애정 있는 비판의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일이다. 서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교육적 문제에 대한 비판과 토론의 문화를 형성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해는 관리자들과 관리를 당하는 사람이 구분되는 현실에서는 많은 문제를 노출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권력을 지닌 강자나 관리자들이 하기에는 상당히 힘든 문제이다. 관리자들의 이해는 자신의 기득권이 침해받지 않은 한계 내에서 허용되며, 설령 이해를 한다고 하여도 자신의 권위를 빛나게 할 때에만 이해를 한다. 관리자들이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향한 비판을 받아들이는 일이며, 토론의 문화에 참여하는 일 일뿐이다. 그리고 약자가 강자를 이해할 때 나타나는 문제는 잘못된 상황과 관계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약자의 강자에 대한 왜곡된 이해는 그 잘못된 상황과 관계의 변화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잘못된 상황과 관계의 변화를 원치 않음은 또 다른 굴종으로 이어진다. 이런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맺어지는 교사들간의 관계는 지배와 복종의 관계로 맺어지고, 명령체계와 상하의 지휘체계를 확고히 한다. 그런데 문제는 약자의 이해 속에서 이런 관계를 마치 넓은 도량으로 이해한다는 차원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 지배와 복종, 명령과 굴종의 교사 관계는 더욱 견고해지고 그 모습을 감추곤 한다. 약자에게 이해란 현존 질서의 인정일 뿐이며, 잘못된 상황과 관계에 대한 고개 숙임으로 이어지기가 쉽다. 그 결과 교사들에게도 침묵의 문화가 형성되는 것이다. 약자의 인간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잘못된 질서와 관계에 대한 애정 섞인 비판일 뿐이다. 결국 인간에 대한 이해란 서로의 발전을 위한 비판의 관계 속에 있으며, 비판 속에 담긴 사랑의 마음속에 있다.
이런 애정 어린 비판의 관계 속에서 교사들은 서로의 단점을 수용하고, 장점을 서로에게 확대해 나가야 한다. 다른 교사의 삶에서 가장 좋은 것을 발견하고, 자신 속에서 가장 좋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확장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도덕성을 더 많이 요구받는 교사들의 인간관계에서는 “서로가 지닌 장점의 확장"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혼자만의 실천은 개인의 이익으로 끝나기 쉽기 때문에 아이들의 행복한 삶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장점을 함께 공유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애정어린 비판적 교사관계에서 무엇을 인내하고 무엇을 참지 말아야 하는가의 구분이 필요하다. 좋은 것은 인내해야 하며, 좋지 않은 것은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 옳지 못한 일이 일어나는 데도 참는 것은 아이들에게 비교육적 활동으로 이어지며, 옳은 일이 있는 데도 실천하지 못하는 비겁함 또한 아이들의 삶에는 나쁜 영향을 준다. 교사들의 깨어있는 인간관계는 ”옳음의 실천과 옳지 못함의 비판“이라는 용기 속에서 만들 수가 있다.
Ⅱ. 교사로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
교사로서의 삶에서 보람 있는 일은 <아이들의 행복한 삶>을 만나는 일이고, <자기 자신의 삶에 애정과 열정을 쏟아 붓는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다. “아이들 스스로가 아이들 삶의 희망으로 만들며 살아가는 한 사람”을 만나는 일만큼 행복한 일이 어디 있을까? 행복한 사람을 만나는 일이 교사의 보람이다.
몇 년전 반에서 꼴찌를 하던 000이란 아이가 있었다. 그 당시 성적에 의한 순위와 줄세우기 문화가 학교의 전부였던 시기에 반에서 꼴찌를 하던 아이가 자기를 소중하게 여기고 자기의 삶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일로 변화되던 모습을 볼수 있었다. 그 아이는 학급에서 늘 겉돌았고 친구없이 혼자 구석에 앉아 잠만 자던 아이였다, 하지만 그아이에게는 컴퓨터 워드작업능력을 배우고 있었다. 그아이에게 학급문집을 만들면서 문서편집이라는 일을 맡겼고 그아이가 흥미있던 그 일에 열심히 하면서 아이는 살아나고 있었다. 350쪽에 해당하는 문집“작은 소크라테스의 희망”이 완성되었을 때 그 아이는 이미 자기 자신이 학급에서 꼭필요한 존재임을 느끼고 있었고, 그 아이의 제안으로 12월 31일 밤을 새워 문집을 마무리하고 1월 1일 새벽 4시에 관악산 일출을 위한 등산에 오를 수 있었다. 교사에게 어쩌면 한 아이의 삶을 주체적으로 세우고 한아이가 자기삶에 애정과 관심을 쏟아부을 수 있는 기회와 계기를 제공할 수 있는 교사자신의 능력을 발견하는 일만큼 보람있는 일은 없다.
그리고 반에 전학왔다가 1주일만에 다시 영등포고로 전학을 갔던 김00이라는 아이....
아이들에게는 기회와 가능성을 열어주는 일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그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에 참여할 수 있는 교사자신을 발견하는 일만큼 행복하고 보람있는 일은없다.
그아이는 반에서 주번활동을 맡았고 운동장에서 전교생이 모여 조회를 하던 날 아이는 교실청소를 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잠을 잤다. 순찰중이던 주번교사에게 엎드려 있는 상태에서 등짝과 목덜미를 맞았고 아이는 그 과정에서 기분나쁜 표정과 반항적인 모습을 보였다. 아이는 교무실로 끌려왔고, 조회를 끝내고 교무실로 들어오던 선생님들에게 태도가 불손하다는 이유로 다시 한두대씩 맞았고 아이는 참지못하고 대들기 시작하여 선생님과 몸싸움까지 하였다. 그 아이는 결국 학교에서 퇴학을 맞아야 했다.
그때 담임이었던 나는 그 아이에게 마지막 기회는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아이가 반성하고 다시 학교생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급회의를 통해 학급전체의 문제로 공론화시켰고 문제를 해결할 수 방법을 의논하였다. 그결과 우리반 전체의 반성이 필요하고 그러면서도 아이를 구제할 수 있는 반아이들 전체의 소견서를 학교에 제출하였다. 우선 우리들은 자발적인 참여자들을 모아 담임과 함께 학교내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처음에 12명, 그 다음날 18명, 그 다음날은 25명, 점점 더 아이들은 참여하였고 일주일을 하던 마지막 날에는 한번씩은 다 참여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그 아이는 퇴학에서 전학으로 조치되었다. 더욱 놀랐던 것은 그 다음해 스승의 날 그 아이가 비에젖은 장미한송이를 들고 학교에 다시 찾아와 전해에 자신이 선생님들께 했던 불손한 행동에 대해 일일이 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며 용서를 구했던 일이었다. 아이가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미워할 수 있는 반성의 마음을 알려줄 수 있었고 오히려 아이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었던 그 일은 지금도 교직에 대한 보람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Ⅲ.학교교육의 발전을 위한 방안
교육이란 아이들이 행복한 삶을 만들고 자기 삶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태도를 기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교육활동을 위해 여러 가지 방안과 고민이 필요하다.
우선 교사를 “걸어 다니는 교육기관으로서 존중”하는 사회적 풍토의 조성이다. 교사가 권력의 하수인이나 자본시장의 소비자를 양산하는 일에 골몰할 경우 황폐화되고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가고 그 결과 아이들에게 남는 것은 앙상한 경쟁과 메마른 서열의 우선순위에 기울어지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교사가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자기반성과 자율적인 판단과 책임을 통해 자기 정화와 조절의 능력을 계발하고 더불어 그런 교사의 교육적 노력이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과 사회적 존중의 확보가 필요하다. 교육은 아이들에게 희망과 가능성을 이야기하며 자신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교사자신이 좌절과 분노와 억압의 문화속에서 살아간다면 아이들에게도 그런 영향이 끼칠 수밖에 없다. 교육의 출발점은 교사이며 교육의 종착점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교육의 시작이며 교사는 교육의 마무리이다. 교사의 교육기관으로서의 존중, 자율적 판단과 책임에 따른 교육활동의 보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두 번째로 교사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제도 개선이 절실하다. 교사는 서서 공부하는 사람이다. 교사를 시장의 논리에 맡겨 경쟁만을 일삼는 기조가 주류를 이룬다면 교사의 마음에는 아이들을 담아낼 수 없다. 우선은 나눔과 협력의 문화가 주류를 이루고 경쟁과 효율성의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가 되는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 교사의 안정된 마음과 정서는 아이들에게 용기와 겸손함이란 정신적 혜택을 줄 수가 있다.
그리고 제도개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대학입시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하다. 대학의 요구에 맞는 전형방법이 아니라 고등학교에서 전개된 교육내용에 따라 아이들을 선발하는 방향으로의 선회가 필요하다. 중등 교육이 정상화되지 못하는 주된 원인은 대학입시의 하위기관으로 전락한 현실에 있다. 대학입시에 따라 고등학교 교육이 좌지우지되는 현실을 이제는 고등학교 교육내용에 따라 그 결과를 가지고 아이들이 자신이 가고 싶은 대학에 지원하는 형태의 체제가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 시스템이 정착되지 않는 한 학교교육은 수능 점수 높이기와 일류대 진학을 위한 경쟁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啐啄同時-나의 교육'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학급문집을 통한 학급운영 (0) | 2013.08.30 |
---|---|
교사의 꿈 (0) | 2013.08.30 |
삶의 몸짓들 (0) | 2013.08.29 |
그림자 밟기 놀이 (0) | 2013.08.29 |
오래된 반성 (0) | 2013.08.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