啐啄同時-나의 교육

삶의 몸짓들

nongbu84 2013. 8. 29. 15:33

 

존재의 몸짓.

 

 

하 나.

 

나침반은 북극점을 가리키며

바늘 끝을 가늘게 떨고 있을 때

자기의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만일 나침반의 바늘 끝이 흔들리지 않고 정지해 있다면

고장난 장난감일 뿐 자기의 사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나침반은 방향을 가리키는 일을

삶의 업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침반은 늘 파르르 떨고 있는 얼굴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깃발은 사람들의 소망을 담아 흔들리고 있을 때

자기의 존재를 이 세상에 세우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람이 세차게 불어도

깃발이 사람들의 소망을 담아내어 흔들리지 못한다면

헝겊의 나풀거림일 뿐

자기의 존재 기반을 상실한 것입니다.

깃발은 가슴 벅찬 소망으로

존재의 밑바닥에서 솟구쳐 오르는 함성으로 흔들리는 것을

삶의 업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깃발은 온 몸을 흔드는 몸짓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에게 향을 발라줌으로써

삶의 가치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만일 향나무가 나무를 찍는 도끼자루가 된다면

그것은 부지깽이로도 쓸 수 없는 삭정이 일뿐

용서를 가르치는 향나무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향나무는 상처의 아픔으로 엮은 용서를 가지고

죽은 영혼을 달래는 향불로 거듭 태어날 자격을 지니는 것입니다.

파도는 긴 호흡으로 들이마시고

한 숨에 몰아 토해내는 충격으로 태어남으로써

존재의 근원을 찾아 떠날 줄 압니다.

파도는 먼저 바닷가의 돌들을 반듯하게 고르는 일로

존재의 근원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낮은 곳을 찾아 흘러 흘러 들어드는 일로

삶의 맥을 세워 나가는 것입니다.

만일 파도가 존재의 근원을 찾아

아래로 떠날 수 있는 파장이 되지 못한다면

파도는 그저 물거품일 뿐

거센 에너지가 되고 힘줄 튀어 오르는

변화의 근원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파도는 충격과 파장으로 돌에 온 몸을 부딪치는 모험으로

살아가기를 좋아합니다.

 

 

두 울.

 

개구리는 논둑에서 밤새워 울 때

사랑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두 눈이 튀어나오도록 목젖에 피가 나도록 울부짖을 때

사랑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개구리가 울지 않는다면

아무리 봄이 오더라도 가슴 저린 사랑을 얻을 수 없습니다.

개구리는 울음으로 존재의 업보를 달래고 있습니다.

 

새는 물고기를 잡아먹는 일에 만족하지 않고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가고자 할 때

새가 될 수 있습니다.

날기를 그치고 언덕에 앉거나

배부름에 취해 졸고 있을 때

새는 날개를 잃은 닭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애벌레는 나뭇잎을 갉아먹고 편안히 잠자는 일에 만족하지 않고

나비가 되고자 하는 소망을 지닐 때

나비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소망은 애벌레이기를 포기할 만큼 간절해야 합니다.

 

 

세 엣.

 

사람은 떨림, 흔들림, 되갚음, 흐름으로 살아있음을 증거합니다.

떨림은 사명을 완수하려는 몸짓이며

흔들림은 소망을 이루려는 치열함이며

되갚음은 좋은 일을 이루다가 얻는 마음의 상처를 달랠 수 있는 치료약이며

흐름은 존재의 시작을 지속해 나가는 처절함입니다.

분명히 삶에는 세속적인 성공보다 더 중요한 삶의 가치가 존재합니다.

사람이 살 수 있는 모습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다만 그 모습 속에 거스를 수 없는 자연법칙이 존재하는 모양만은 닮았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살 수 있는 영역과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이 우주를 모두 살아갈 수 없으며

영원한 시간을 통해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사람에게 허락된 유일한 것은

자신이 살 수 있는 영역에서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여 사는 일이며

자신이 살 수 있는 시간에서

가치 있는 것에 정성을 들이는 양을

많이 확보하여 사는 일 일 뿐입니다.

 

존재함에는 최소한의 예의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한정된 시간과 영역을 살다보면

돈의 많고 적음에 현혹되기 쉽고

지위의 높고 낮음에 유혹되기 쉽고

명예의 넓고 좁음에 흐트러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런 세속적인 성공과는 분명 차이가 나는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삶”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존재함에는 편안, 편리, 빠름보다

더 가치 있는 원칙이 필요합니다.

어떤 모양의 세상살이라도

그저 살 수 없으며

쉽고 편안하고 빠르게 이루어질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원칙이 적용됩니다.

더욱이 “가치 있는 삶”은

어렵고 불편하고 시간이 오래 걸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구불구불한 나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나무는 자기가 태어난 환경과

딛고 서있는 땅과

처한 위치에서

스스로 성장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자랍니다.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굽을 뿐 결코 꺾이는 법이 없습니다.

길게 누워 뻗은 좁은 그림자를 만들기도 하지만

더 넓은 그늘로 사람살이의 쉼터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구불구불 성장하지만 그 안에

수많은 생명을 품고 가꾸는 가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네 엣

 

우리는 교사입니다.

돈도 없고 명예도 없고 지위도 없는 교사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도 최소한의 예의와 염치가 필요합니다.

돈이 없어도 명예가 없어도 지위가 없어도

우리가 교사일 수 있는 것은

세상을 당당하게 살 수 있는 태도입니다.

돈, 지위, 명예, 물질적 풍요, 생활의 편리보다도

더 중요한 “삶의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의 삶으로 알려주는 일입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그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그 희망을 가꾸는 일입니다.

나만의 출세와 물질적 풍요와 생활의 편리함으로

몰아치는 회초리꾼이 아니라

함께 이익을 얻고

함께 등 따숩고 배부른 세상을

만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함께 아이들과 손잡고 학교 정문을 걸어가는

교사의 뒷모습이 너무도 그리운 세월입니다.

함께 좋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교사의 진지한 얼굴표정이

너무도 보고싶은 세월입니다.

교사에게는 찬바람 분다고 투덜대고 불평하는 일보다는

내 한 몸 들이밀어 바람 부는 구멍을 막아내는 모습이 필요한 세월입니다.

교사에게는 불났다고 구경하며 소리치는 모습보다는

맨 발로 뛰어가 물 한 양동이 들고 오는 모습이 요청되는 세월입니다.

알고 보면 교사는 너무 쉽게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오랫동안 포기할 수 없는 “가치 있는 삶”을 실천하는

발걸음일 뿐입니다.

알고 보면 교사는 좋은 가치를 늘 바라보며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 일 뿐입니다.

집은 아래에서 위로 짓는 법이지만

교사의 존재가치는 가치 있는 것을 가지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올 때 세워지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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