牛步萬里-나의 삶

친구

nongbu84 2014. 9. 18. 09:49

 

친구

 

1. 내 어릴 적 꿈은 전봇대의 꼭대기에 올라가 보는 일이었다. 그 꼭대기에 올라가 세상을 보고 싶었다. 어머니가 곡식을 이고 돈을 사러 장 고개를 넘어간 날에는 더욱 올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내 키는 너무 작았고 전봇대의 손잡이를 잡을 수도 없었다. 그럴 때면 심술이 났고, 짱돌을 집어 전깃줄을 묶어 놓은 애자단지를 향해 던졌다. 돌멩이가 전봇대 꼭대기의 애자단지를 맞추면 사금파리가 떨어졌다. 나는 조각난 사금파리를 들어 외로움을 그어버렸다. 다섯 개 정도 외로움에 선을 그으면 어머니는 돌아오셨다. 하지만 돌멩이는 애자단지를 빗나가기 일쑤였고, 그 돌은 아버지의 논에 떨어졌다. 논흙을 밟으며 풀 뽑기에 한참이던 아버지의 맨 발바닥은 그 돌멩이에 찢어졌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쓰라린 상처를 뜨근한 논물로 달래며 담뱃진을 짓이겨 발랐다. 커갈수록 내가 던진 돌멩이는 전봇대의 꼭대기를 빗나가 아버지의 논에 떨어지는 날이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그 돌은 아버지의 가슴 논에 처박혀 붉게 멍들고 붉은 반점으로 남았다. 내가 나이가 들고 세상에 욕심을 낼수록 아버지의 가슴 논에는 자갈돌이 수북하게 쌓여만 갔다. 나는 이제 그 전봇대에 돌을 던지는 심통을 부리지 않아도 될 만큼 나이가 들었다. 나는 그 전봇대를 올라갈 힘도 생겼고 올라갈 만큼 키도 컸다. 그리고 내가 전봇대를 오르다가 죽어도 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도록 생명보험에도 가입해 놓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전봇대에 올라가 보고 싶지 않다. 이미 나는 전봇대에 올라가 볼 수 있는 것이 많지 않고 올라가보았자 세파의 고단함과 노여움만이 보이며 볼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해야 세상이 아니라 내 욕심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이제는 그 전봇대를 올라가고 싶지 않다. 오히려 그 전봇대를 바라보면서 어릴 적 던졌던 돌멩이가 아버지의 논에서 다시 내게로 날아오고 있다. 다시 날아와 내 가슴에 박히는 아픔을 반복하고 있다. 세월을 살면 살수록 세상을 향해 오르면 오를수록 가슴 켠켠히 쌓인 돌들이 큰 둑을 이루어 가고 있다.

 

 

2. 나이가 들어 직장에 들어가 퇴근길의 한적함을 즐길 수 있다. 퇴근길에 전봇대가 여러 개 서 있다. 전봇대는 두 팔을 세상의 집들을 향해 벌리고 서있다. 간혹 운이 좋으면 새들이 전봇대의 팔에 앉은 모습을 감상할 수도 있다. 도시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허수아비, 그 팔에 앉은 제법 간이 큰 새......... 이 세상에서 제일 긴 것은 아마도 전봇대에 매달린 전기선들일 것이다. 집안 곳곳이 들어앉은 선까지 합치면 지구를 몇 바퀴 돌고도 남을 만큼 제법 길이가 길다. 어디로 가고 싶어 저리도 길 팔을 뻗고 있는지 더 뻗고 싶어 끊어질 듯 팽팽하게 힘줄 튕겨 오르고 있는지.......... 양쪽으로 전기선을 벌려 뻗은 전봇대의 모습을 보면 꼭 십자가가 서 있는 형국이다. 그 십자가에는 상처 난 곳을 감은 붕대처럼 광고지나 전단지가 빙 둘려 붙여져 있다. 마치 그 모습이 언니보다 키가 훌쩍 커버린 계집아이가 언니치마를 물려 입고 서있는 모습이다. 아니 미류 나무처럼 비쩍 마른 계집애가 언니의 치마를 물려주었다고 "싫여! 싫여!" 투정을 부리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다가 어머니한테 혼나고 훌쩍이고 있는 모습이다. 전봇대는 전단지를 달고 서서 세상 사람들의 눈길을 기다리고 있다. 아침 출근길에도 저녁 퇴근길에도 분 냄새 피는 졸업반의 정문에서도 사람들의 걸음과 멈추어선 눈길을 기다리다 지쳐가고 있다. 전봇대와 전단지는 서로가 친구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자기들을 찾아줄 새로운 친구를 늘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둘은 이미 오래 전 부터 사귄 아주 익숙한 친구이다.

 

 

3. 오늘처럼 바람이 부는 날 전단지는 사람들이 발걸음 멈추어 따뜻한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는 모멸감에 웅웅 울부짖는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무척 비가 내리는 날이었는데 누구 하나 다가와 바라보는 사람이 없었다. 전단지가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어 서게 할 수 없다면...... 자기의 사명을 잃은 것이다. 전단지가 사람들의 눈길 한번 끌어낼 수 없다면........ 자신이 태어난 이유를 상실한 것이다. 다만 전단지는 전봇대에 매달려 누덕 누덕 기운 치마처럼 바람에 흩날릴 뿐이다. 비라도 오면 뭉게뭉게 옹이진 덩이가 되어 길바닥으로 주르르 흩어져 형체도 없이 사라질 뿐이었다. 전봇대를 찾아와 처음으로 붙여질 때는 구석구석 달라붙었을 텐데도 자기의 사명을 잃은 후에도 냉정하게 형체도 없이 스러져 간다. 전단지는 바람 부는 날에는 웅웅거리며 우는 일로 비가 오는 날에는 뭉게뭉게 스스로 흩어지는 발버둥으로 자기를 힘겹게 버티고 있다. 하지만 전단지에게는 이미 오래된 친구가 하나 있다. 전단지가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늘 함께 했고 함께 지켜보았던 전봇대가 그의 곁에 늘 있었다. 술 취한 사내가 방뇨를 할 때 수줍어 얼굴 붉히던 추억도 함께 하고 가슴 뻐근한 사랑에 취한 남녀가 손잡고 얼굴을 맞대던 일도 몰래 훔쳐보며 등 돌릴 때 안아주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둘은 달빛을 바라보았고 달빛을 가슴에 안으면 붉게 둘의 우정도 물들었다. 오래된 우정은 늘 잊고 살아가는 법이다. 잊어버릴 정도로 익숙한 것 그것이 친구이다

 

........... 2001.09.12. 오래된 친구를 생각하며 여름지기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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