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밤, 꿈을 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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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주막의 아랫목에서 등 따숩게 누워 있는 사내의 꿈이었습니다. 그 주막의 앞마당에는 은행나무 한 그루 서 있습니다. 오랜 세월 ‘그 주막의 아버지가 그 주막의 아들’에게 나뭇가지 타고 올라 먼 곳을 보여주고 싶어 두엄더미 옆에 심었다고 하였습니다. 오랜 세월의 바람과 서리가 내리고 봄가을이 반복할 때마다 곧게 서 있더니 은행알들이 징그럽게 매달렸다고 하였습니다.
그 주막 ‘아버지의 아들’이 산길을 넘어 고향을 떠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아들을 배웅하는 어머니 모습 뒤로 붉은 홍시가 몇 개 달고 감나무가 서 있습니다. 석과 불식-튼튼한 과실은 동물에게 먹히지도 않을 뿐더러 함부로 썩지도 않는 법-을 아직은 모르는 열 댓 살의 까까머리 소년의 모습이었습니다.
소년이 떠난 후 빨랫줄에 매달린 빨래가 펄럭였습니다. 빨래집게는 햇살 한 움큼을 찝고 매달려 있습니다, 전기 줄에 매달린 참새처럼 빨래집게는 흔들리는 것들을 붙들고 있습니다. 펄럭이는 빨래 찝게가 내 몸을 찝고 있습니다. 빨래 찝게의 아귀힘에 내 몸은 가위눌린 채 꼼짝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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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꿈에서 깬 후, 가을 산행을 하다
가을아침, 햇살은 군청색 야전잠바를 입은 나뭇잎에 놀러왔다가 샛노란 여우오줌을 찔끔 갈기고 갔습니다. 저녁에는 붉게 물든 노을마저 소풍 나왔다가 은행나무에 눌러앉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먼발치에서 발뒷꿈치를 들어 앞산을 바라봅니다. 내 눈길은 부드러운 능선을 타고 산등성이를 넘습니다. 첩첩 쌓인 산을 넘고 넘어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도착합니다. 그 곳은 진달래꽃 흐드러지게 피었던 동산이며, 노란 등불 달고 사람을 기다리는 주막집 같은 곳입니다. 먼발치에서 산을 보면 부드러운 곡선이거나 육감적인 자태를 자랑하지만 그 산의 길을 걸어보면 그곳은 울퉁불퉁하여 넘어지기 쉬운 험한 곳입니다.
그 산봉우리를 향해 걷기 시작한지 꽤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산의 중턱을 오르고 있습니다. 발길은 자꾸 웅크린 돌덩이에 걸리고, 패인 웅덩이를 헛디뎌 넘어지기도 합니다. 산하나 오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산의 중턱에서 나뭇가지에 옷깃이 찢기고 팔뚝에는 상처가 실처럼 그어졌습니다. 그 상처 따라 빨간 피가 송글송글 맺혔습니다. 넘어지면서 디뎠던 손에는 가시도 박혔습니다.
내 손에 박힌 가시는 먼지처럼 작지만 우주처럼 커 보입니다. 티끌처럼 작은 가시가 꼭 목구멍으로 넘어가려는 터럭처럼 자꾸 파고들고 있습니다. 뱉어 내려고 애쓸수록 자꾸 안으로 넘어가듯, 가시가 자꾸 손바닥 속으로 파고듭니다. 손바닥이 따끔 따금 파고드는 게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닙니다. 생손 앓듯 얼얼합니다. 다른 사람 손에 박힌 가시는 아픈 줄 몰랐는데, 내 손에 박힌 가시는 무척 아픕니다. 그러면서 세상 사물 모두가 아파하며 내 아픔을 위로해 주기를 원합니다. 참 이기적인 생각을 합니다.
산길을 걷다 보니 함께 걷던 친구의 티끌만한 실수나 잘못이 마당 가득 깔린 멍석보다 커 보이고 미워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힘이 들고 가파른 오르막을 걸을수록 친구가 내가 증오하는 사람보다 더 밉고 더 화가 납니다. 사랑하는 친구의 먼지만큼 작은 잘못 때문에 산행이 어려워진 것 같아 그 친구를 미워합니다. 사랑하는 친구에게는 냉정하고 엄격하면서 자신에게는 인자하고 너그러워집니다. 사랑하는 친구의 실수나 잘못에 너그러워지고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를 채찍질하면서 반성하면서 스스로 달래고 다독여 보지만 너무 힘이 듭니다. 참 이기적인 날들입니다.
사람들 각자 어느 방향의 산길을 잡아 걸어가든 ‘노란 등불 켜놓고 사람 기다리는 주막’을 찾아 떠났을 것입니다. 온 몸의 고단함이 풀리는 등 따수운 아랫목처럼, 미움이 눈 녹 듯 사라지는 주막을 찾고 있을 것입니다. 그 주막에는 제 손의 가시를 뽑으면서 손님의 손에 박힌 가시를 바늘 끝으로 빼내주는 주인 아낙이 있을 것입니다.
‘노란 등불 달린 주막집’에는 산굽이처럼 넘실대는 춤사위가 있고 강물 같은 물줄기로 파장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 주막에는 함께 걸어가는 친구의 가시가 내 손에 박힌 가시보다 더 크게 보이는 풍경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먼지처럼 작은 실수나 잘못을 너그럽게 감싸 안으며 받아들이는 생활이 있을 것입니다.
주막집 옆에는 밑둥치에 도끼자국이 난 향나무 한 그루 서 있을 것입니다. 향나무는 자기를 찍은 도끼에 향을 발라 주었을 것입니다.
산길을 오르면서 주막집의 사람이 너무 보고 싶어 가을 내내 노란 전구를 나무마다 가득가득 달아 놓습니다. 주막을 찾고 싶은 마음에 빨간 단풍이 들고 노란 낙엽에 누운 햇살마저 바스락 마르고 있습니다. 밤늦은 산행을 하는 날은 등불 매달린 주막집이 더욱 그립습니다.
두려움을 모르고 떠난 산 길, 하지만 산에서 두려움을 알 만한 밤늦은 시간이 되면, 산은 그 사람이 두려워 노란 등불을 처마에 매단 주막집을 보여 줄 것입니다.
3. 다시 삶의 이유를 생각하다
펄럭이는 빨래는 보아도 그 빨래를 붙잡고 있는 집게의 아귀힘은 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겨우 보입니다. 삶이란 빨랫줄에서 빨래의 펄럭이는 화려함이 아니라 빨래를 찝고 있는 집게의 아귀힘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삶이란 밤늦은 시간 등불달린 주막처럼 그 자리에서 불 밝히는 일입니다. 낮에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 은밀한 파장입니다. 삶이란 드러내지 않기, 혹은 드러나도 과시하지 않기이며, 우직하고 묵묵하고 겸손하게 사람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살면서 ‘노란 등불달린 주막집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만이 그 집에 대한 인식을 가능하게 만들 것 같습니다. 주막에 살고 있는 사람에 얼마만큼 다가서는가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앎의 깊이와 넓이도 달라질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마음이 몸살 앓는 것처럼 신열을 나게 만듭니다. 몸살 앓지 않고 성장하는 나무는 없듯, 그리운 마음의 신열 없이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가장 뼈아픈 후회는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황지우)"인 것 같습니다. 가슴에는 사막의 황량한 바람이 불고 서걱이는 모래알만이 남아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것은 마음 아픈 일입니다. 사막이 사막일 수 있는 것은 그 안에 오아시스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듯,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것은 사람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일 것입니다. 등불 달린 주막 같은 사람만이 사람의 희망이며 삶의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