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락과 나의 삶 : 등 따숩고 배부른 세상을 위하여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을 생각하면 코를 닦으며 책보자기를 메고 학교 다니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 때 나는 십 여리 길을 걸어 다니면서 왼쪽 가슴에는 이름표와 콧 수건을 달고, 등에는 책보자기를 대각선으로 둘러매고 다녔다. 책보자기를 허리에 둘러매고 배꼽주위에서 질끈 동여 매듭을 지으면 여자아이라고 놀림을 받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른쪽 어깨와 왼쪽 겨드랑이 사이로 빗금 긋듯 책보자기를 둘러매고 가슴팍에서 끝자락을 동여매었다. 어깨에 둘러맨 나의 책보자기 속에는 함께 놀 수 있는 ‘영희’의 이름이 있었고, 길을 가다가도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그 자리에 서서 가슴에 손을 얹고 부동자세를 취할 수 있을 정도의 국가에 대한 ‘경례’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라면 땅을 사먹을 수 있을 정도의 ‘셈’이 있었으며, 가난한 ‘도시락’과 아직 여물지 않은 ‘꿈’이 있었다. ‘따뜻한 도시락을 닮은 꿈’과 ‘배불리 먹을 도시락’을 둘러매고 십 여리 길을 달리면 따뜻한 밥의 온기가 등짝으로 전해왔다.
초등학교 3학년 겨울의 어느 수업 시간이었다. 여러 층의 도시락이 지층의 겹처럼 솔방울과 솔가지를 피어 올린 난로 위에서 뜨겁게 데워지고 있었다. 선생님은 4교시 수업이 시작될 때 도시락을 난로 위에 쌓아 놓도록 배려를 해 주셨다. 그 당시 주번은 수업시간 틈을 내어 맨 밑에 있는 도시락부터 맨 위에 있는 도시락까지 번갈아 데워주었다. 주번은 짧은 옷소매를 빼어 뜨거운 도시락을 올리고 찬 도시락을 내리면서 골고루 데우곤 하였다. 그런데 그날의 수업시간, 도시락 속에서 밥이 데워지는 냄새와 김치가 익는 냄새가 교실 가득 진동하였다. 주번은 시간이 지나도록 도시락을 갈지 못하고 있었다. 선생님께서 수업시간이 산만하다면서 꾸중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맨 밑에 위치하고 있던 나의 도시락은 까맣게 타기 시작하였고, 내 마음도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나는 속이 까맣게 타는 심정을 그때 알았다. 그 때 속 타는 심정은 밥 타는 냄새처럼 애절하였다. 그 이후 삶의 문제는 입술마르며 속이 바짝 말라 타는 간절한 애절함으로 다가올 때가 많았다.
탄 밥에서 겨우 몇 숟가락 골라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책보자기 안에는 빈 도시락이 들어 있었다. 빈 도시락 속에서 숟가락과 반찬통이 부딪치며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달그락 달그락”.... 내 달릴수록 그 소리는 커져만 갔고 내 배고픔도 덩달아 커져 갔다. 그날 나는 뱃속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로 다가오는 배고픔을 알았다. 그 이후 배고픈 가난은 빈 도시락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로 찾아왔다. 그 날 이후 삶의 가난은 빈 그릇 가득 한숨과 눈물을 퍼부으며 달그락 거리는 숟갈 소리를 잠재우는 아픔으로 다가올 때가 많았다.
빈 도시락의 울림에서 가난을 듣던 내가 까까머리 중학생이 되었다. 중학 시절을 생각하면 동네 아이들과 정월 대보름날, 오곡밥을 얻으러 어스름한 달빛 아래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기억 한켠에서 나는 ‘그녀’를 추억한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 ‘그녀’의 집 앞에서 마주쳤던 ‘그녀의 그 눈빛’, 나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정지와 침묵 상태, 나는 달빛 아래의 그 추억을 잊지 못한다. 그 순간 사랑은 가던 걸음도 붙들어 온 몸을 전율케 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 때 사랑은 부동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짝사랑’이었다. 하지만 나는 ‘짝사랑이 가져온 불면의 행복'과 함께 ‘친구들의 도시락을 뺏어먹는 엄석대의 힘’도 지니고 있었다. 체육 수업시간이면 담임의 권한을 위임받은 ‘엄석대’로 빈 교실에 남았다. 친구들의 책상서랍에서 도시락을 꺼내 밥과 반찬을 덜어 먹었다. 그 때 나는 완장의 위력과 권력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방법을 경험하였다. 그 이후 내 삶에서 힘과 사랑의 문제는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중학 시절 나는 이십 여리 길을 자전거를 타고 산을 넘고 이슬바심하며 학교를 다녔다. 아주 가끔 ‘달빛 아래의 눈빛’, ‘팔뚝에 문신 새기듯 마음에 새겨 두었던 계집아이’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페달에 힘을 주어 달렸다. 뒤에 앉은 ‘심장의 눈빛’이 내 허리춤을 잡아주기를 은근히 기대하였다. 하지만 자전거를 타고 비포장 길을 달릴 때 도시락 김치 국물은 넘쳐흘렀다. 그리고 그녀는 김치 국물 냄새를 무척 싫어하였다. 결국 ‘그녀’는 떠났고, 나도 아버지가 넘었던 황토 산마루 길을 넘어 고향을 떠났다.
서울로 전학하여 고등학교를 다니던 나는 도시락을 먹으면서 평생 함께 할 친구를 사귀었다. 지금은 40대의 고단한 아버지가 된 녀석이다. 가끔 만나 집값이며 커가는 아이들에 대한 걱정이며 밀린 카드 값을 함께 걱정하는 녀석이다. 늦가을의 어느 날 늘 점심을 함께 먹던 녀석이 결석하였다. 나는 점심을 굶었다. 가슴이 허전했다. 허전한 가슴으로 밥이 넘어가질 않았다. 자율학습을 빠지고 담임의 교무수첩에서 몰래 친구의 주소와 약도를 옮겨 적었다. 약도를 들고 바람이 휘돌아다니는 동대문구 전농동의 골목골목을 찾아다녔다. 녀석이 살고 있는 동네를 수소문하고 그 지역의 골목골목에서 녀석의 흔적을 뒤졌다. 겨우 찾아낸 집, 방안에서 녀석은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하루 종일 판자촌의 지붕이 바람에 흩날려 마음아파 울고 있었다. 뻐꾸기도 쉬어가지 않는 산동네 1번지의 수돗물이 얼어 울고 있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녀석, 아픔이 유난히 커서 큰 안경을 끼고 겁먹은 표정으로 다니는 녀석의 심정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도시락을 굶던 날, 처음으로 배고픔 보다 더 안타까운 ‘친구’의 아픔을 보았다.
대학시절에도 도시락을 싸들고 다녔다. 누님 집에 한 몸 의탁하여 살던 시절이었다. 그 때 누님은 없는 살림에 계란 부침을 밥 위에 얹어 주었다. 잔디밭에 빙 둘러 앉아 도시락을 먹으면서 스무 살 안팎의 아린 외로움을 달랬다. 사치스럽게도 스무 살의 청년에게 봄의 아지랑이가 피었고, 가을의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으며, 겨울의 칼바람이 가슴을 쥐어뜯었다. 그래서 도시락을 놓고 몇은 토론을 하였으며, 도시락을 먹다가 누군가는 사라졌으며, 도시락을 훔치러 몇은 떠났다. 또 몇은 함께 먹을 도시락을 단체 주문하러 갔으며, 몇은 배불리 먹을 도시락을 연구하느라 도서관에 앉아 있었으며, 몇은 계단이나 광장에 앉아 빼앗긴 도시락을 찾으려 싸웠다. 떠나는 자들은 따뜻한 도시락의 꿈을 남겨 놓았으며, 다가오는 자들은 차가운 도시락을 먹고 체한 채 배앓이를 하고 있었다. 그 시절 나는 고민하였다. "등 따수운 방에서 따뜻한 밥을 먹을 날은 언제일까? 건축현장 사무실 전구를 모아 밥을 데워 먹는 건강한 밥의 맛과 가즈런하게 접시에 놓인 멸치의 맛은 어떨까? 여럿이 함께 먹는 밥상의 분위기는 어떨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밥을 먹기 위해 거리에서 지내야 하는 시간의 길이는 얼마나 될까? 대학 시절 내내 나는 빈 도시락이 자꾸 울린 후에 따뜻한 밥이 채워지는 이치를 알고 싶었다.
대학 시절이 끝날 즈음, 나는 빈 도시락은 뱃속에서조차 덜그럭 거리는 숟갈 소리가 난 후 채워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도시락 속에서 숟가락에 부딪친 도시락의 상흔을 보면 혼자 밥을 먹을 수는 없었다. 나는 부딪치고 찌그러진 도시락속에서 배불리 먹을 밥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나의 결혼도 도시락이 맺어주었다. 다른 학교에 근무하던 14년 전의 소풍날, 이른 새벽 아내는 도시락을 싸 가지고 천호동 모퉁이를 돌아 세 번째에 있던 나의 자취방을 찾아왔다. 새벽 먼동이 검은 머릿결을 뒤로 넘기며 얼굴 내미는 시각이었다. 밤새 모서리를 만들던 내게 아내는 더운밥에 마음을 담아 가지고 찾아왔다. 그 날 천호동 자취방은 무척 따뜻했으며, 따뜻한 아침을 모처럼 먹는 나는 날카로운 모서리를 부술 수가 있었다. 아내는 따뜻한 도시락을 내려놓으면서 따뜻한 마음도 함께 놓고 갔다. 나는 그 때 몸에 문신 새기듯, 마음에 오메가를 닮은 사랑무늬를 새겼다. 바로 이 사람은 나의 이른 새벽 함께 따뜻한 밥을 먹을 사람이라고 나무 조각에 도장 새기듯 내 마음에 새겼다.
교직에 들어오면서 나는 처음으로 도시락에 관련된 교육의 문제를 경험하였다. 첫 담임을 하면서 ‘수학여행이나 소풍, 수련활동을 갈 때 내 도시락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는 고민을 안겨주었다. 내 도시락을 내가 준비해서 먹는 일이 자연스런 일인데, 그 때는 학부모님이 준비해 준 도시락을 먹는 일이 몸에 익숙한 관습이었다. 그 상황에서 내 도시락을 준비해서 먹는 일은 학부모가 싸 준 도시락을 뿌리치고 먹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내 도시락을 준비해서 먹는다는 것은 부모의 정성(?)이 담긴 도시락을 뿌리치는 무례함으로 여겨졌고, 도시락 속에 감추어진 ‘내 아이’에 대한 특별한 배려를 알지 못하는 무지로 여겨졌다. 하지만 나는 그 무거운 청탁과 향응의 댓가를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얻어먹는 밥이 무척 불편하였다. 나는 도시락을 스스로 준비하는 선택에서 망설였지만, 결국 도시락을 준비하였고 아이들과 함께 먹었다. 망설임과 고민 끝에 선택한 도시락준비는 그 이후 몇 번의 시도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마침내 ‘얻어먹는 밥은 먹지 않겠다’고 선언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나의 선택과 시도는 이오덕 선생의 교육 경험담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교사는 아이들과 함께 정성스럽게 싸온 밥을 나누어먹을 줄 알아야 한다.’ 이오덕 선생은 소풍을 다닐 때 꼭 도시락을 준비해 가지고 가서 먹었다. 학부모님들이 준비해 준 푸짐한 도시락을 둘러앉아 먹는 동료 교사들을 등 뒤로 하고 아이들과 함께 도시락을 먹었다. 동료 교사들은 그런 이오덕 선생을 손가락질하였다. 혼자 잘 난척 하는 ‘놈’ 정도로 여겼으며, 미풍양속을 해치는 ‘버릇’없는 교사로 욕을 하였다. 그래도 이오덕 선생은 자신을 선택을 꿋꿋하게 지켜 나갔다. 이오덕 선생의 경험담을 읽으면서 나는 도시락의 문제가 나 혼자만의 고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내 스스로의 선택은 손가락질을 감당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으며, 얻어먹는 밥보다 내가 준비하는 밥의 가치를 일깨워 주었다. 그 이후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갈 때 학부모님들이 싸 주시는 도시락을 받지 않았다. 밥을 얻어먹으면 까실까실한 밥이 목에 걸려 목이 메이고 속에 얹혔다. 아이들과 특별히 다른 밥상을 만들어 먹는 일도 불편하였다. 그래서 나는 담임을 맡은 10년 동안 아내가 챙겨주는 도시락을 들고 소풍을 갔다. 수학여행이나 수련활동을 갈 때면 아내는 김밥과 따뜻한 국을 싸 주었으며,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하는 아이들의 도시락까지 챙겨주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아이들과 함께 도시락을 먹었으며 간혹 내 도시락을 준비해 온 아이들이 있으면 도시락을 바꾸어 먹었다. 요즘은 내가 싸온 도시락을 아이들에게 주고 선생님들과 함께 먹기도 한다.
그런데 올해 처음 나는 수련활동이나 소풍을 다니면서 도시락을 싸 가지고 가지 않았다. 비담임이기도 하지만 학부모님이 챙겨주는 도시락 문화가 사라지고 각자의 출장비에서 점심값을 모아 일회용 도시락을 시켜 먹었기 때문이었다. 나 혼자의 고민을 풀고 여럿이 함께 고민을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고민거리도 생겼다. ‘출장비를 모아 함께 준비하는 일회용 도시락 문화가 지니는 일회성 만남을 경계하면서 각자의 정성으로 싸온 도시락을 나누어 먹는 문화를 만들어 보면 괜찮지 않을까?’, ‘정겨움과 오순 도순한 식사시간의 문화를 자리잡게 할 수는 없을까?’ 도시락을 함께 먹는 정겨움과 오순 도순한 분위기까지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나는 학생들과 생활하면서 도시락을 함께 먹는 오순 도순한 정겨움을 경험하였다. 학급운영을 하면서 한 달에 한 번씩 먹던 비빔밥은 아이들을 만나는 기쁨의 시간이었다. 한 달에 한 번씩 각자 싸온 도시락을 큰 그릇에 넣고 각자 싸온 반찬을 넣고 참기름 두어 방울 똑 떨어뜨려 비비면 맛있는 ‘비빔밥’이 되었다. 다른 반 녀석들이 창가에 달라붙어 참기름 냄새를 맡으며 입맛을 다시고 있으면, 창문 너머로 한 숟가락씩 보시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학급운영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넓은 잔디밭에 앉아 점심을 먹는 일이나 비빔밥을 해먹는 일은 정겨운 경험을 안겨주었다.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만큼 정다운 일을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요즘은 가끔 교실에서 피자 냄새가 나지만 참기름의 고소한 냄새를 따라갈 수는 없을 것 같다.
또한 나는 학생들과 생활하면서 도시락을 싸오던 시절의 4교시 풍경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은 급식을 통해 점심을 먹지만 몇 년 전만 하여도 각자 도시락을 준비하여 점심시간에 먹었다. 한참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이라 2교시가 끝나면 도시락을 먹는 아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점심시간 책상을 앞뒤로 돌려 식탁을 만들어 먹는 아이들이 많았다. 4교시 수업이 끝나기 10분전, 정겨운 풍경이 교실 가득 펼쳐졌다. 아이들은 책상 서랍 속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던 도시락을 꺼냈다. 오순도순 둘러앉아 도시락을 먹으면서 아이들은 신나게 이야기를 하였다. 2교시 끝나고 먹은 녀석들 중에는 숟가락 하나 들고 도시락 탐험에 나서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럴 때 나도 숟가락 하나 들고 아이들 틈에 끼어들었다. 아이들과 돌아다니면서 아이들의 도시락에서 한 숟가락씩 보시를 받았다. 먹다 보면 배가 불렀다. 밥을 먹으면서 나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요즘 학교생활 어떻니?” “집에 무슨 일이 있니?” “ 지나번에 싸운 친구와 말은 하니?”....
요즘 비담임의 여유(?)를 즐기면서 고민과 반성을 한다. ‘학교에 출근할 때 아이들을 마음 가득 담은 도시락’을 만들 수 있는 ‘단 한번 뿐인, 단 하나의 교사’로 사는 일에 게으름을 피웠던 내 자신에 회초리를 대고 있다. 요즘 나는 다시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닌다. 점심시간 3층 휴게실에서 모여 점심을 먹으면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아내가 챙겨주는 도시락을 보면 그 전날의 아내와의 사이(?)가 들통 나기도 하지만, 도시락에 감추어진 아내의 편지를 보면 너무 행복하다. 도시락위에 놓인 아내의 편지를 보고 집으로 되돌아갈 때 아내를 담은 마음의 도시락을 싸 가지고 돌아간다. 빈 도시락이 넘쳐나도록 내 마음을 담아 집으로 간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는 아내가 챙겨주는 따뜻한 도시락을 가지고 출근한다. 그 도시락의 온기를 느끼며 나는 아이들을 가득 담은 마음의 도시락을 준비하며 학교 정문을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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