牛步萬里-나의 삶

창에 머물다 가는 슬픈 것들

nongbu84 2009. 7. 24. 10:41

창에 머물다 가는 슬픔과 아픔도 내 친구


그의 할아버지는 살구나무 시큼하게 서있는 흙집에 살던 ’문풍지‘ 라는 장님이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고 소리만 들었습니다. 방 안 등잔 불빛만을 보듬고 살았습니다. 화롯불의 온기가 사라질까봐 조바심을 냈습니다. 아랫목 이불 속에 묻어 둔 밥그릇이 식을까봐 찬바람 불면 소리 내어 울기도 하였습니다. 뱀 허물 같은 나무껍질로 엮은 옷을 입은 탓인지 목도리 같은 따뜻함은 품지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바람 따라 전해오는 세상 소식을 자주 들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풍문을 따라 세상으로 떠나고 싶었지만 떠날 수 없었습니다. 탯줄처럼 감긴 문살을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문살에 붙은 채 떠나지 못하는 서러움은 물뭍은 손 쩍쩍 달라붙는 문고리의 한기로 달랬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평생 동안 찬바람 하나 막으며 살았습니다. 문살을 부여잡고 제 몸을 이불처럼 펼치고 껄껄한 한파를 막았습니다. 다만 손가락만한 구멍하나를 가슴에 허락하였습니다. 그 구멍으로 세상 소문과 풍경이 찾아왔습니다. 그 구멍 사이로 사람들이 지나갔으며, 개들은 짖어대고, 눈발이 흩날리고, 찬바람이 눈 속으로 새어들었습니다.


그는 ’유리창‘ 입니다. 그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버스를 타고 고향의 흙집을 떠났습니다. 떠나기 전날 밤새 진눈깨비가 내렸습니다. 길에는 덕지덕지 눈얼음이 얼어붙었고 바람은 눈물 나도록 차갑게 불었습니다. 그는 온 몸으로 버스 안을 감싸 안았습니다. 버스 안은 사람들의 체온으로 습기가 가득 올랐습니다. 그는 이별의 몸살을 앓았습니다. 온 몸에 신열이 오르고 더운 숨을 토해냈습니다. 그는 ’버스의 유리창‘ 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온 몸에 성에가 가득 찼습니다. 그는 몸에 문신을 새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움켜진 주먹의 뒤끝으로 사람들의 발자국 모양을 새겼습니다. 어릴 적 동무의 이름을 새기고, 할아버지의 가슴을 뚫은 듯 구멍모양도 새겨보았습니다. 문신을 새기는 아픔은 사람들의 더운 입김으로 다독이며 지웠습니다. 사람들의 입김에서는 한숨이 들리고, 소주 냄새가 진동하고, 담배냄새가 나기도 하였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을 때, 그는 자신의 몸에 ’이마를 처박고 문지르는 삶의 무늬‘ 를 새길 수 있었습니다. 찬란한 서늘함을 느낄 수 있는 문양이었습니다. 아름답고 슬픈 이마의 열기로 만든, 머리 쿵쿵 찍어댄 당돌함 같은 ’삶의 문신‘ 이었습니다. 그 문신은 쩡 울리는 아픔과 날카로운 슬픔을 주었습니다.

버스는 오랫동안 달려 기차역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가 기차역에 도착한 시각은 자정을 훨씬 넘긴 밤이었습니다. 대합실에는 몇 사람들이 간이의자에 누워 자고 있고, 그들의 머리맡으로 사과 몇 개와 떡을 싼 보자기가 있었습니다. 대합실에는 아픔과 슬픔을 등에 짊어진 채 세월이 졸고 있고, 눈물 몇 가닥이 국수처럼 묶여져 한 쪽 구석에 쌓여 있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였습니다. 어둠 속으로 길게 누운 철로에 눈을 두면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 듯 온 몸이 빨려갔습니다. 이제 그는  늦은 밤 ’기차역의 유리창‘ 으로 남았습니다. 온 몸의 피가 철로 속으로 빨려가고 창백한 그의 얼굴만이 남았습니다. 그의 얼굴에 타들어가고 있는 화톳불의 잔흔이 얼비쳤고, 눈발이 하얗게 쌓인 설경이 비쳤습니다. 화톳불은 주인을 잃은 채 타닥타닥 콩깍지 튀듯 땅바닥에 자맥질을 쳐댔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서 대합실과 철로를 바라 보았습니다. 그리운 할아버지의 품도 생각났습니다. 동무들의 이름을 불러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둠은 모든 것을 빨아들인 채 침묵만을 남겼습니다.


고향을 떠난 이후 그는 도시의 벽돌 건물에서 살고 있습니다. 안과 밖의 경계를 만들며, 안으로 따뜻한 기운을 보듬어 안고, 밖으로 찬바람을 막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는 자신의 몸에 비친 사람과 세상의 풍경을 다시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를 좋아합니다. 요즘 그에게 그리움을 만든 사람들이 자주 찾아옵니다. 사람들은 들릴 듯 말 듯 독백에 가까운 소리를 읊조립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은 그 곁에 사람들이 더 많이 찾아와 이야기 합니다. 그는 ’건물의 유리창‘ 입니다. 그의 몸에 슬픈 것들이 어른거리고 얼비칩니다. 그리움을 만든 사람들이 더운 입김을 불어 성에를 만듭니다. 성에꽃들이 어린 아기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듯 피었다가 사라집니다. 새까만 밤이 밀려오면 불빛이 다가오고 유리창에는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립니다. 그리운 사람의 얼굴도 찾아옵니다. 그리운 사람의 이름이 들립니다. 가슴으로 되돌아 가 파묻히는 그리움입니다. 그리운 사람의 얼굴은 그의 등 뒤에 가장 큰 그림자로 섭니다. 그리운 사람을 가슴에 품어 안습니다. 그리운 사람의 심장하나가 그의 심장에 달라붙어 박동을 칩니다. 그리운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그의 심장에서 울립니다.  그는 ’투명한 유리창‘ 입니다. 많은 것들이 그에게 찾아왔다가 떠나갔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그리운 사람과 그리운 추억뿐입니다. 참 그리운 사람과 추억을 떠올리며 밤을 지새웁니다.


.............아침에 출근하여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내 어깨에 기대어 머리카락 두 세 개씩 남기고, 말할 때 “아니, 이봐!!!!!!!”를 버릇처럼 말하던 그리운 사람. “그 아픔에 한 번 전화 걸어 봤어. 내가 대신 아픔을 겪을게”하던 그리운 사람. 창가에 앉아 네온사온 불빛에 어른거린 노을을 얼굴에 담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기도 하고 눈물도 훌쩍이던 그리운 사람. 내 표정만으로도 슬픔을 알아버리고, 밤 10시 이전에 꼭 집에 들어가야 하며, 걸을 때는 뒤꿈치를 약간 들어 걷느라 어깨가 출렁이고, 기분 좋으면 어깨를 툭툭 치며 내 손에 온기를 전해주던 그리운 사람. 치마를 입고 싶어 하지만 바지를 자주 입어 긴 다리를 뽐내던 그리운 사람. 충청도 사투리로 “그려”하며 내 이야기를 귀담아 주고, 사람의 이름을 자주 불러주고 함께 퇴근하는 길에서 화나면 종종걸음으로 고개 숙이고 달아나던 그리운 사람. 지금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 멀리 떠나간 그리운 사람. 추억으로 남은 그리운 사람........


그의 가슴(유리창)에 그리운 사람의 얼굴이 머물다 가는 날은 삶이 슬프도록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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