閼雲曲 -시

슬픔의 계보

nongbu84 2017. 6. 22. 14:32

슬픔의 계보

 

그날부터 지붕에서 넝쿨을 뻗은 슬픔이 내려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오래된 재래시장을 떠돌던 가슴만을 가져 사다리를 옮기지도 못한 채 뒤란 처마 밑에서 서성거렸습니다. 마당 한쪽 술 취한 버드나무가 흔들리면 가끔 잊어도 좋을 슬픔이었지만 영근 아침볕이 싸록싸록 낯가죽을 때리면 슬픔은 지붕 위 기왓장처럼 켜켜이 쌓였습니다. 곰곰 생각해 보면,

 

그날은 할아버지 열쇠가게 뒤쪽에 500원짜리 조립장난감을 팔던 슈퍼가 문을 닫았거나 현대 홈 타운이 논밭이던 시절 혼자 심심해서 119에 장난 전화하다가 혼난 날이거나 전자렌지에 급히 뎁힌 설탕 넣은 우유 맛이 나는 그런 하루는 아니었습니다. 그날은 장수하늘소가 번개 맞은 눈으로 쏘아 본 하늘에 붉은 노을이 번지는 저녁 학골 조맹춘씨 자두나무 가지가 쪼개져 한 서너 말 정도의 눈물을 함뿍 쏟던 어린 날처럼, 이랑에서 통통한 감자알이 몰려나오고 양파 꽃은 낮달처럼 환하게 넘쳐나고 도라지꽃들이 무리지어 넘실거리던 밭을 멧돼지떼가 몰려와 가슴까지 헤집고 간 늙은 날처럼 속상했습니다. 곰곰 생각해 보면,

 

그날 강 너머 지붕 빨간 집으로 건네주던 줄 배 한척 불어난 장마에 미루나무 꼭대기에 걸려 더 이상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뭉게구름이 걸려 걸음을 멈추는 일은 자주 있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습니다. 더 이상 건너 갈 수 없다니요. 입술 빨간 살구나무에 걸린 노을을 볼 수 없다니요. 장독대에 내리쬐던 봄볕을 느낄 수 없다니요. 깊은 우물에 비치던 파란 하늘은 어쩌구요. 뺨을 어루만지던 바람의 손길은 어떡 하구요. 아니 당신을 만날 수 없다니요. 이 강둑에서 당신을 부르다가 목쉰 두루미 두발 늪지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날부터 달팽이가 아주 오랜 세월 등에 적은 편지 전하려 오늘도 억새풀 한 잎 한 잎의 처음과 끝을 걷고 있습니다. 업보(業報)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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