閼雲曲 -시

등대 3 - 길

nongbu84 2017. 7. 14. 11:55

 

묵호 3 – 길 : 논골담길

 

논골담길 어딘가에 당신이 있다면 짧은 분홍 실을 부챗살처럼 펼쳐놓고 마치 화장 솔을 벌려놓은 듯한 자귀나무 꽃이 담보다 낮은 지붕의 집에서 불쑥 솟아 피었을 것이다. 정갈하고 화려한 짧은 트럼펫 같은 능소화도 지붕 파란 집의 담을 넘어 당신을 반겨줄 것이다. 물론 담 밑에는 깔때기 모양으로 기다랗게 생긴 붉고 노란 능소화 꽃이 잔뜩 떨어져 여름 오후의 강렬한 태양 아래에 서 있는 당신의 실존을 알려줄 것이다.

 

그 길에선 바위틈에 다닥다닥 어깨를 맞대며 사는 따개비들 같은 집들 사이로 난 골목길을 헤치고 빨간 등대가 있는 언덕 위로 뼘을 재듯 자벌레처럼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면서 올라가거나 아니면 비린내를 자주 잣아 올리고 소금에 절인 가난과 오래도록 묵힌 욕설과 가슴에 끌어안은 침묵이 있는 항구 어판장 아래로 내려가는 일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을 것이다. 담을 넘어 가는 것도 샛길로 빠져 사라질 수도 없을 것이어서 환한 빛으로 안내하고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골목길을 여기저기 기웃대며 걷다보면 더위도 당신의 길 찾기를 방해하지 않을 것인데

 

어찌하여 등대에 오르면 등대가 충혈된 눈으로 하는 말을 들을 것이고 ....... 자네 왜 이제 왔는가 이 무심한 친구야 그래 바닷바람에 날리어 왔는가 아니면 소금에 절은 안개에 묻혀왔는가 왔으니 친구여 자네는 바다를 바라보시게 먼 바다에서 등 돌린 배가 있는지 살펴보시게 난 낮잠 좀 잘거네 지난 밤도 꼬박 새웠다네

 

어찌하여 어판장으로 가면 문어를 삼다가 아주머니가 몸빼 속에 감쳐둔 목소리로 말을 할 것이다 ..... 그 양반 저 바다에서 죽은 지 한 십년은 되었지 문어 넣고 끓인 라면 잘 잡 숩던 양반인데 무화과가 밥먹듯 좋아했는디 아, 말여, 무화과가 짓물러 떨어지면 그게 그리 싫여, 그래서 맨날 갖다 저 바다 던져준다니까

 

당신은 산비탈 사이 길에 어느 한 날 그냥 내어 던져져 사는 날이 많을 것이다. 어느 길을 선택하여 오르거나 내려가지만 어느 길로 가든 모든 골목은 이어져 서로 통할 것이다. 다만 당신이 걸은 만큼 길은 자신을 내어주어 등대를 보여주거나 바다의 배를 보여줄 것이고, 당신이 이미 걸은 걸음에 길이 있음을 알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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