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과 능숙함에 도사린 함정을 경계하며
1. <비당연함>을 당연하게 여기는 잘못에 대하여
<비당연>이 <당연함>으로 굳어진 학교입니다.우리들은 그 안에서 <비당연함>을 <물론 그렇지>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살아갑니다. 감아 놓은 태엽이 풀리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꼬마병정인형의 모습입니다.
<비당연>이 <당연함>으로 둔갑한 학교입니다. 우리들은 그 안에서 자기 검열을 엄격하게 합니다. 검열기준과 수칙이 있습니다. 상급자의 입맛과 눈치에 맞추는 자기 행동과 몸가짐입니다. 올바른 교육적 신념과 소신은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안위에 이익이 될까 손해를 될까가 판단의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자신의 검열을 마친 후에 <물론 그럴 수 밖에 없지>하고 체념합니다. 결국은 권력의 하수인으로 자기를 몸단장하며 자기의 말을 예의바르게 다듬는 일을 합니다. 오히려 지금은 익숙한 자기 검열로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까지 부여하고 열변을 토하기도 합니다.
자기 검열에 익숙한 사람들은 인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이루어져야 할 선택을 단 한번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가두고 있는 철조망을 자신의 보호막으로 생각합니다 철조망이 자기를 가두고 있음에도 그 철조망의 울타리를 자기를 보호하는 장치로 여깁니다. 새장에 갇혀 길들여진 새와 같습니다. 자신의 자유를 잃어버렸음에도 말 잘 들으면 주는 먹이와 먹이를 구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에 길들여진 상태로 울어대고 있습니다. 그 철조망안에 갇혀 단 한번도 탈출을 꿈꾸지 않습니다. 다만 옆 동료를 엎드려 무릎꿇리게 하고 그 위에 올라가 철조망 너머로 뻗은 가지끝의 열매만 따먹을 줄 압니다. 새장안에서 자기의 영역만 더욱 넓히려고 다른 동료의 영역을 빼앗으며 다른 동료의 울음과 눈물위에서 자신의 영광을 구합니다.
자기 검열에 익숙한 자는 자신의 기쁨이 다른 사람의 눈물 위에 서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어머니의 두 젖가슴이 출렁이며 한 생명에게 우주의 꿈을 이어주는 이치를 알지 못합니다. 우주의 젖줄을 물려주며 한 생명에게 달나라의 토끼가 떡방아 찧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머니의 심정을 알지 못합니다. 세계의 희망으로 뻗쳐나가는 그 눈망울을 알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두 손으로 움켜쥐는 우주의 소망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 검열로 <비당연함.을 <당연함>으로 여기는 자는 교실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복도를 서성이며 흘끔흘끔 교실안을 기웃거리는 구경꾼일 뿐입니다. 교실에 들어오고 싶으면 뒷짐을 풀고 넥타이를 풀고 검열하여 다듬어 놓은 도덕을 풀고 <당연함>의 세계에 <물음표>를 던져야 합니다. 교실에서 아이들과 온정을 나누고 싶은 자는 다듬은 말과 단정한 몸맵시를 풀고 <물론>의 대답대신 <아니오>를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차가운 싸늘함으로 콘크리트처럼 굳어버린
가슴을 쩍 갈라지게 만드는 메마른 가뭄이 필요합니다.
2. <올바른 불편함>이 사라진 <익숙함과 능숙함>에 대하여
학교에서 <올바른 불편함>이 사리진지 오래입니다. 그 대신 기교와 말장난으로 옳바르지 못한 익숙함과 능숙함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능숙한 기교와 익숙한 말장난이 교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입니다. 몰염치와 뻔뻔스러움으로 온갖 기교와 아양을 떨며 분냄새를 풍기고 있습니다.
능숙함과 익숙함속에서는 경험이 지혜로 반성되지 못한채 잡다한 시장창고의 물건처럼 쌓여 있습니다. 때와 장소에 따라 물건을 꺼내듯, 필요에 따라 바꿔칠 수 있는 말과 행동이 능숙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위치가 바뀌고 자리가 바뀌면 언제든지 바꿔쳐서 내뱉을 말과 행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익숙합니다. 무지를 가장한 몰염치에 익숙합니다. 잘못을 하고 반성할 줄 모르는 뻔뻔스러움에 익숙합니다. 스스로의 선택과 결정, 그리고 책임을 내리지 못하고 타성에 젖은 이해타산으로 판단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익숙합니다. 매와 체벌이 교육적이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아이들 가슴에 상처를 주고 보여주기 위한 박제화된 교육활동에 익숙합니다. 타율적인 강제성으로 아이들의 자율성을 억누르는 교육장치와 형식을 만드는 일에 익숙합니다.
익숙합니다. 자신의 이해관계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자리 하나 얻기 위해 양심을 버리고 친구를 버리는 일에 익숙합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잘못을 저지르는 일에 익숙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행동하기 보다는 행동하고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온갖 궤변과 몰염치를 저지르는 일에 익숙합니다.
이제는 그 잘못들의 익숙함이 능숙함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출세를 위한 기회주의적 속성과 해바라기 근성, 그리고 시키는 일이 잘못되었어도 책임감으로 해내는 노예근성이 능력으로 둔갑하였습니다.
잘못된 익숙함과 그 익숙함의 능숙화는 사람들을 몰염치와 뻔뻔스러움으로 치장하게 합니다. 올바른 불편을 겪어낼 용기는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잘못된 익숙함은 불편과 아픔속의 열정과 정성을 잊어버린지 오래입니다.
불편해져야 합니다. 그 불편함 속의 열정과 정성을 당해 낼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제 익숙함과 능숙함의 견고한 껍질을 깰 수 있는 것은 <원시적 열정>과 쩍 갈라지는 <무관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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